나 또한 내가 파리에서 보낸 시간들을 대책없이 미화하고, 가끔은 진한 향수에 시달릴 때가 있으나, 오늘 나보다 더한 사람을 만났다. 두산아트센터에서 오늘 막을 올린 생각은 자유>를 통해서였다.

 

 

작/연출을 맡은 김재엽 씨의 1년간의 베를린 체류기는 말그대로 엉성한 콜라주의 밭이다. 자신의 극에서 연극의 책임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우습게도 극 내에는 그다지 책임감 없이 던지는 이미지들이 난무한다. 세월호, 1113 파리테러, 위안부 나눔의 집 이야기까지. 바깥에서만 보이는 안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희망이 다소 과했다. 또한 안의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바깥의 문제를 감상적으로 다루는 것, 영감으로서 활용(사실 이용이라고 말하고 싶다)하는 것이 용인될 수 있는 문제인가도 의문이다.

 

 

이런 문제들이 극에 대두될 때, 배우이면서 인간 자신이기도 한 예술가는 필연적으로 한없이 진지한 태도를 갖게 된다. 결의 넘치는 표정을 배우가 짓도록 만드는 예술가의 책임은 보다 막중하다. 내가 보았다고, 그래서 하고싶다고 막 올려서는 안 된다. 당연하게도. 또한 장장 130분의 러닝타임에서 배우들이 대사를 주고 받을 때, 몇 차례 어색한 침묵이 있었다. 그것은 초연이기 때문일 수도, 혹은 대본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본인은 후자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애초에 이 극이 구사하는 언어가 연극의 언어가 아니며, 어떠한 인물도 그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극이 오늘 보여준 침묵은 작가 자신의 독백, 혼잣말, 일기의 문장, 그 낱낱의 문장들 간에 메우지 못한 틈새다. 한 인물과 다른 인물의 말은 갈등도 긴장도 이루지 못한다. 영원히 충돌하고 항상 화해하는 자기 자신의 생각이므로. 배우들의 대사가 꼬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배우들이 말을 씹는 횟수를 심지어 세아려 보았는데, 정확히 바를 정자가 두 번이나 완성되고 삼 획을 더 그었다. 한 인물의 말버릇이 아니라, 극 전반 배우들이 고루 그러했다. 침묵, 말더듬기. 이것이 인물의 성격 형성에 도움을 주기는 커녕, 그냥 이 연극 자체의 성격이 침묵과 말더듬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관객은 창작자의 기대보다 훨씬 더 똑똑하다. 그리고 그들은 세계시민 난민 이주민-소위 디아스포라에 대해 알고 싶은 내용이 있었다면, 차라리 책을 읽을 것이다. 어떤 이야기는 그것이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 가능한 형식을 스스로 찾아간다.

 

 

오늘 극장에서 벌어진 일은 이것이 연극이 될 수 없음을 증명했다. 교수님은 독일 체류기에 관한 강연 혹은 극작스플레인을 하셔도 될텐데 구태여 연극을 올리셨을까. 사람이 꼭 하던 것으로 보여주어야 하는가, 뭐 생각은 자유라면 할말 없다. 연극이나 똑바로 해야할 텐데. 아 정말, 그러게나 말이다. 극에서 파독 간호사와 재독 간호사 간의 차이, 적확한 언어 사용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는 대목이 있다. 나는 나라가 보낸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해서 왔소. 그래서 파독이 아니라 재독이오. 손님이 아니라, 주인으로서 여기 살아있고 싶어요. 1년이라는 체류 기간의 한계일까, 혹은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는 스타일인걸까. 다 모아서 태우고 그 잔해에서 시작해도 모자랄 텐데 이것들을 모아다 꼴라쥬를 시도하다니. 그 따뜻한 마음은 어떻게 이해해보겠으나, 오늘의 극은 아무리 생각해도 파독형 극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심지어 제 발 지린 대사도 있었다. 대본은 안 쓰고, 자기에 대한 성찰을 한 거네? 유감스럽다. 프로라기엔 상당히 치사한 전략이다.

 

 

 

 

반응형

 

 

 

 

 리얼리스트가 그리는 살인은 국가와 도시를 지배하고 사창가에서 돈을 번 남자들이 호텔, 아파트, 유명 레스토랑을 소유하고 영화배우가 조직의 끄나풀인 그런 세상에서의 일이다. 홀 아래쪽에 있는 멋진 남자가 불법 도박판의 보스인 세계이고 셀러에 밀주를 가득 채워 넣은 판사가, 주머니에 술 한 병 갖고 있었다는 이유로 한 사내를 감옥에 보낼 수 있는 세계이다.

 

도시의 시장이 돈을 버는 수단으로 살인을 용인하는 세상. 법과 질서가 말로만 이야기되지 실현은 되지 않기에 마음 놓고 어두운 거리를 걸어 다닐 수도 없는 세상이다. 대낮에 노상강도를 목격해도 그 강도의 친구가 총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또 경찰이 당신의 증언을 싫어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리고 결국 마지막엔 멍청한 배심원들과 정치적인 판사 앞에서 악덕 변호사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공개 법정에서 당신을 모욕하고 비방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강도 짓을 신고하기보다는 군중 속으로 재빨리 숨어버리게 되는 그런 세상이다. 이것은 향기로운 세상이 아니지만 바로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다. 그리고 강한 정신력으로 냉철하게 세상과 거리를 둘 수 있는 작가라면 매우 흥미롭고 심지어 매혹적으로 그려낼 수도 있는 세상이다.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 재미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일로 죽어야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죽음이 우리가 문명이라 불리는 것의 한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 살인은 때로 흥미로울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예술이라 불리는 모든 것들에는 구원적인 특질이 있다. 순수한 비극이 구원일 수 있다. 만약 그것이 고도의 비극이라면 말이다. 연민과 아이러니일 수도 있다. 강한 남자의 거친 웃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비열한 거리를 한 사내는 걸어가야만 한다.

 

 

그 자신은 비열하지 않은, 타락하지도 않았고 두려움도 없는 그런 사내. 이런 류의 이야기에서 탐정은 바로 그런 사내여야 한다. 그는 영웅이며 모든 것이다. 그는 완성된 사내여야 한다. 그는 보통의 사내이지만 평범한 사내는 아니다. 다소 변색된 표현을 사용하자면 그는 명예를 아는 남자여야 한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러한 사내다. 그러겠다는 생각도 없고 그래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이야기란 숨은 진실을 찾기 위한 그 사내의 모험이다. 그 일이 모험에 적합한 사람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것이 모험이 되지도 않았겠지만 말이다.

반응형

 

 

지금 내가 뭘 하냐고 누가 물으면, 아마 나는 희곡을 쓰고 있다 혹은 연극을 한다, 그렇게 답할 것이다.

 

 

희곡으로 전향한지는 이제 일년 남짓 되어간다. 레이조스 에그리의 희곡작법을 보면-꼭 그것을 읽지 않더라도 기본적인 극작술에 따르면-모든 연극은 '생의 전환점'에서 시작한다. 인물들 중 적어도 한 명은 지금 이 무대에서 생이 위태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극적 순간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희곡을 쓸 때 재능이라면 재능이다. 소설에서 희곡으로 돌린 가장 큰 이유는 이것때문이었다. 내가 쓰는 소설의 지엽적인 문제, 그것의 구질구질함이 너무도 싫었다. 진심을 다한 작품이었는데 내가 읽기에도 구질구질했다. 그런 식으로 쓰는 사고가 너무도 굳어져버려서,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쓰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더 큰 이유는 작가가 되기 위해 그 구질구질함을 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왜 쓰는가, 그 문제가 글을 쓰는 사람의 평생 화두라면..., 나는 나라는 인간의 찌질함과 지엽적인 문제들을 쓰기 위함이었다. 이것을 쓰며 작가가 될 수 없다면, 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나은 일이었다.

 

 

연극을 공부하면서, 나는 이제껏 만난 인생의 전환점들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이내 우스운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이제까지의 삶에서 거의 매순간을 인생의 전환점처럼 여겨왔다. 고등학교 입학도, 대학교 입학도, 한때 만난 사람들도, 프랑스행도, 어떤 수업들도, 하물며 술에 취해 처음 만난 사람과 나눈 대화까지도. 언젠가 친구 W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중학생 때부터 나를 봐오신 W의 어머니가, 나는 표정만 보아도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사는 것 같다는 말을 하셨다고. 나도 이런 내가 싫었다. 남들이 쉽게 생각하는 문제는 며칠을 고통스러워하고, 남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문제는 너무도 터무니없이 결정했다. 얼마 전에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사실 나는 항상 연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모든 순간이 생의 전환점이라고 착각하면서 아무도 찾지 않는 무대위에서 열과 성을 다해 연기하고 있다고. 나와 내 친구들 내 또래까지 모두 너무도 연기에 능하다고. 이제까지 우리의 삶이 모두 연기와 사기로 점철되어있는 것은 아닌가. 너무 무섭지만.

 

 

연기를 하는 매순간 나는 생의 전환점에 있었다.
남들 다 가는 대학에 가보려고, 혹은 일이라도 한번 해보려고, 씨발 그놈의 돈 좀 벌어보려고. 그렇게 노력했던 매 순간에 나는 연기를 해야 했다.

 

 

얼마전 면접을 본 곳에 나는 내 장점을 '한계를 아는 것'이라 말했다. 여자고, 지방 출신이고, 돈 없고, 너무도 오래도록 나였기에 지긋지긋한 나의 특성들, 어쩌면 절대로 변하지 않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어른의 조건은 자기 한계를 아는가와 직결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 그렇지만 자기 한계 또는 바닥에서 무언가를 시작하는 데에서는 항상 위대함이 피어난다고, 여전히 그렇게 믿는다. 그렇지만 그곳에서는 나의 맥락을 읽어주지 않았다. 외려 내게 컴플렉스가 있느냐고 물었다. 비참했다. 내 인생관이 저급한 것으로 치부되는 순간이었다. 너의 자기소개는 니가 글에 갖는 애착이 너무 크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나는 여기에 대단한 일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내가 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모두 약점이 되는 것 같아 방어기제처럼 튀어나간 말이었다. 하지만 사실이다. 어차피 세상 모든 일이 힘들다면 조금이라도 덜 힘을 들여서, 그냥 내가 잘할 건덕지가 조금이라도 있는 '일'을 하기 원했다. 무지 재수없었을 것이다. 혼자 고고한척 한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그들과 내가 함께 일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학교 선배 H는 우리 그냥 글을 쓰자 그리고 세속적인 불안은 억지로라도 버리자고 말했다. 그리고 그 면접본 새끼들 그냥 다 존나 붕어빵 기계로 사람 찍어내는 새끼들이라고 욕해주었다. 친구 W의 앞에서는 울었다. 갈수록 나는 내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만 같다면서 쌀국수를 앞에 두고 정말 추하게 울었다. 친구 S와도 라멘을 먹다 비슷한 대화를 했다. 우리가 결국 가장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을 하게 된 것은 아닐까. 또다른 친구 J와는 대학원 문제에 대해 길고 지진한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 참 잘하는 것이 많았는데, 이제 그게 자랑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했다. 친구 D와는 전어를 먹었다. 미술이랑 소설이랑 뭐가 더 돈이 안되는지, 어디가 더 밥벌이하기 힘든지 얘기하면서.

 


연기를 잘해야 살아 남는다. 그리고 연기를 잘한다는 것은 그리 나쁜 것도 아니다. 그만큼 누군가의 감정과 삶에 대입하는 공감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연기를 한다. 아니, 나는 사기를 친다.
내 삶에 대해서도, 고등학생들의 자기소개서를 첨삭해주면서도. 돈을 받고 하는 일이었지만 학생들의 합격은 내게 늘 자랑이었다. 그들과 그들의 가족에게 기쁨을 줄 수 있었고, 나또한 내 능력을 증명받는 것이었으니. 하지만 만약 누군가 그 능력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비참하게 사기, 라고 답해야할 것이다. 적지 않은 돈이 오고가는 이 시장에서, 누군가가 절박함으로 지불한 돈은 어디로 들어가는지 궁금하다. 모두가 연기를 하는데, 출연료는 누가 받고 있는지 모르겠다.

 

 

반응형

'Tod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0607  (1) 2021.06.07
BEEP, What's your mcbeef?  (0) 2020.12.29
20180512 Rhodes @홍대 롤링홀  (1) 2018.05.12
20180407 오후 네 시  (0) 2018.04.09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그리고 어떤 날의 깨달음  (0) 2017.10.3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