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도 그 여자는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나도 그 그림을 본 일이 있다. 그걸 처음 본 날에,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색칠공부라고 보는 편이 옳지 않은가 생각했다. 연하고 얇게 그려진 외곽선을 따라 그대로 줄을 긋고, 마음대로 색을 채워넣는 식이었다. 컬러링북이라고 하던가, 한국에서도 한때 유행했던 취미였다. 직장에 나가지 않는 날이면, 여자는 식탁에 앉아 색칠공부를 했을 것이다. 고요하고 평온한 집을 느끼는 데 그만한 취미가 있었을까 싶다. 값싼 색료에 일정량의 물을 부으면, 꽤 유사하지만 절대로 원작과는 같을 수 없는 색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든 색을 칠해 넣으면 꽃이, 어린 소녀와 소년들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색의 하늘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나는 그 여자의 취미생활이 그 여자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여자를 존중했고, 문득 그것을 떠올리면 부러울 때도 있었다.


그 날이 한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다음 날이었나. 나는 줄곧 걱정하는 친구의 집을 떠나, 텅텅 비어 적막할 지경인 지하철을 탔다. 4호선의 끝, 파리 북쪽 끝에 우리 집이 있었다. 이탈리아인 제시카와는 평소 필요한 대화 외에는 잘 하지 않았었는데, 그 때는 참 많은 말을 주고 받았다. 걔는 계속 울먹였고, 나는 그 애를 다독여주었다. 나보다 키가 두 뼘은 더 큰 애였다. 나는 어떤 급한 일이 있어서 꼭 나가야 하는 것처럼, 바깥으로 나갔다. Republique 광장에서 시위가 있을 거라는 기사를 봤고, 거기에 가볼 생각이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걔가 항상 조심하라고, 너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상냥한 애였다.

사람들이 놓고 간 애도와 추모의 글귀를, 촛불을 보았다. 동상 하나를 살펴보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대충은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내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반 쯤 알아들었다. 얼마 뒤에 사람들이 뛰었고,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어디로 가야하나요, 나는 모르니까 모른다고 답했다. 천천히 걸어서 집까지 갔다. 거기서 우리 집까지는 사십 분쯤 걸렸던 것 같다. 나는 외국인, 여자, 동양인, 외국인, 여자, 동양인, 그 말을 프랑스어로 줄곧 되새겼다. 그 때는 그 세 단어가 무슨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껏 병적으로 숨기고 싶었던 단어들이었다. 사실임에도, 발화하는 즉시 약해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달랐다. 그것들이 지니는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아빠는 내게 조심하라고 말했다. 그 잡종 새끼들은 어떤 일을 벌일 지 모르니까,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전화기 너머로, 나는 아빠, 여기서는 내가 그 잡종이야. 라고 말했다. 그리고 조심해봤자, 일어날 일은 어떻게든 일어나는데. 뒷말은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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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배우 김주혁이 죽었다. 좋아하는 배우였다. 그의 영화를 보며 시종일관 웃었던 기억이 난다. 교통사고였다. 집에 와서 그 영화를 다시 보는데 줄곧 눈물이 났다. 자꾸만 왜 우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울었다. 그 배우의 기사에 건조한 문장들이 만들어 낸 슬픔이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너무 많이 죽었었다. 그 날 쏟아지던 기사들이 만들어낸 문장에도 슬픔이 있었다. 어떤 일은 결국 일어나고야 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나는 줄곧 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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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힙합이 되려면 자기 테마를 잘 알아야 한다. 그걸 알고 시작하면 명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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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at was the only time, as I stood there, looking at that strange rubbish, feeling the wind coming across those empty fields, that I started to imagine just a little fantasy thing, because this was Norfolk after all, and it was only a couple of weeks since I’d lost him. I was thinking about the rubbish, the flapping plastic in the branches, the shore-line of odd stuff caught along the fencing, and I half-closed my eyes and imagined this was the spot where everything I'd ever lost since my childhood had washed up, and I was now standing here in front of it, and if I waited long enough, a tiny figure would appear on the horizon across the field, and gradually get larger until I'd see it was Tommy, and he'd wave, maybe even call. The fantasy never got beyond that --I didn't let it-- and though the tears rolled down my face, I wasn't sobbing or out of control. I just waited a bit, then turned back to the car, to drive off to wherever it was I was supposed to be.'

 

 

 

소설은 무의미하고 우연적인 인간의 경험들을 재배치하고 그에 수사를 덧붙인다. 때로 어떤 작품은 효과적인 재배치만으로 의미를 갖는다. 물리적으로 같은 시간 속에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끝도 없이 늘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이를테면 서늘해진 아침 바람을 맞고 섰을 때, 약속 시간에 늦은 친구가 저 멀리서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 혹은 벤치에 앉아 한풀 꺾인 여름 저녁의 소리를 들을 때와 같이. 지난 여름,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을 읽다 종종 그런 기분이 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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