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설명해도, 어떤 말을 덧붙여도 절대 이해받을 수 없는 순간이 있었다. 그런 순간이 얼마나 외로운지에 대해 떠들 때면, 나의 다정한 친구는 그런 상황은 대개 두 가지로 볼 수 있다고 정리해주곤 했다. 하나는 다소 오만하지만,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이 바보여서 잘 이해하지 못한 상황이다. 다른 하나는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의 성의에 관한 문제라고 했다.

 

 그 이야기는 꽤 위로가 되었다. 상대를 이해하고, 상대로부터 이해를 받는 일. 다시 말해 누군가와 이해를 주고받는 일이 결국에는 나와 상대방, 우리 둘만의 문제인 것처럼 여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망상으로 키워왔던 끝이 보이지 않는 외로움과 슬픔이, 사실은 정신을 놓은 채 들이붓는 물을 먹고서 미친 듯이 자라난 잡초와 다를 바 없다고 여길 힘을 주었다. 언제든 정신을 차리고, 과감히 뽑아내면 없어질 것들이라고 생각해보는 일도 가능했다.

 

 그러나 외로움이 극심한 날이면, 다정함도 부질없었다. 친구가 일러준 두 가지 상황도 쉽게 반론이 가능했다. 상대방이 바보여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끔 멀끔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그 전에, 내가 이야기를 건넨다고 해서, 듣는 사람은 항상 성의를 다해 귀 기울여 주어야 하는가?

 

 혹시, 이 이해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외로움이 앞으로도 수 차례 닥쳐오고 반복되어 끝내 나를 삼켜버리면 어떡하나.

 

 그 두려움에 짓이겨진 상태로, 나는 조승희의 희곡을 읽었다. 그 희곡 안에는 이해할 역량도, 성의도 없는 상대방을 붙잡고, 어차피 상대는 이해할 수 없으므로 더 이해할 수 없는 말들만 쏟아내는 인물들이 있었다.

 처음 연극을 접했을 때, 무대에 오르는 인물은 각자의 목표와 동기를 가지고 있으며, 목표를 실현할 수 없게 하는 장애물을 앞에 두고 그를 이겨내기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배웠다. 그렇게 만들어낸 인물이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배웠고, 그렇기에 그런 인물을 만들어내는 훈련만 꽤 오래 했다.

 조승희의 희곡과 조승희의 희곡을 읽는 이 극의 인물들은 예의 ‘살아있는’ 인물에서 먼 거리에 있다. 이해받고 싶어서, 또는 너를 이해하고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쏟아내는 인물들. 그들은 아무런 목표도 동기도 없어 보이는 ‘살고 있지 않은’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나의 지독한 어떤 날들의 모습을 닮았다.

 

 말하기조차 지겹고 지독하지만, 섣불리 누군가의 탓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나의 문제와 그 이유, 그것들에 갇혀서 허우적대는 일은 앞으로도 반복될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허우적대다 맞는 뻔한 상태, 상상 가능한 최악의 결말. 그 사이에서 지겹게 오가는 것 외에, 어떤 방식일지는 모르겠으나 조금 더 나은 날도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그리고 언젠가는, 정신을 놓고서 잡초를 기르던 나의 곁에 있어주었던 친구에게도, 조금 더 나아진 날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Tod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Nikon D90, 그리고 Fuji X-pro3  (0) 2022.05.04
20210607  (0) 2021.06.07
20180512 Rhodes @홍대 롤링홀  (1) 2018.05.12
20180407 오후 네 시  (0) 2018.04.09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그리고 어떤 날의 깨달음  (0) 2017.10.3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