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시의 퇴근은 아홉시쯤이다. 저녁 반 수업이 끝나면 아이스링크에 십분 남짓 제빙기가 돈다. 그 후에 이상상태가 있는지 짧게 점검하는 것이 마지막 업무다. 오늘은 링크 밖에서 잡무가 많아 조금 늦어졌다. 열시 십분, 일공일공. 그 숫자를 본 픽시는 짧게 기도를 올렸다. 내일 출근 안 하게 해주세요. 태풍이 오든 홍수가 나든 뭔 일이라도 나서.

중학생 때까지 스케이트 선수생활을 했던 경력으로 얻은 알바자리였다. 편하게 다니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음에도, 픽시는 어쩐지 그 점 때문에 괴로울 때가 더 많았다. 몇 시간을 내리 연습하고 잠깐 허리를 펴면, 이렇게 뺑뺑 돌아 세상 끝에 다다르기라도 할 양 이를 꽉 깨문 동료들이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허리를 굽힌 채 스케이트를 타는 일이 없지만, 여전히 열 살 어린 애들이 새파란 선수복을 입고 연습하는 장면을 봐야했다. 얼마 전에는 그때의 코치도 만났었다. 넌 여전히 효녀구나. 공부를 할 거면 공부만 해야지, 왜 알바를 하고 있니?

그 말을 듣고, 픽시는 빙상장에 딸린 샤워실에서 한 시간 동안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온몸 구석구석 스크럽을 했고, 손가락 마디마디에 자란 털도 뽑았고, 십오 분 동안 트리트먼트도 했다.  젖은 머리칼에서 뚝뚝 흐르는 물방울을 무시하고 쭈그려 앉아, 발바닥이나 팔꿈치의 각질을 살살 뜯어냈다. 아무렇게나 발린 패디큐어를 꾹꾹 닦아낸 다음 발톱을 깎았다. 그렇게 깎은 발톱은 빙상장에다 뿌려 버렸다. 선산에 조상 뼛가루를 흩날리듯, 소원을 적은 풍등을 날리듯.

그런 객기를 부렸던 것도 잠깐 뿐, 픽시는 열심히 출근하고 제 할일을 했다. 잡념이 들 때는 명상이 최고다. 몸의 감각을 완전히 떨쳐내거나, 또는 온전히 그에만 집중하는 것. 오늘은 퇴근 후에 두 명의 남자를 만나기로 했다. 하나는 홍대 다니는 남자, 다른 하나는 건축 사무소 다니는 남자인데, 한 번에는 아니고 한 명씩 만날 계획이었다. 링크로 한 발씩 떼면서, 누구부터 만날까, 어디서 볼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링크 저편에서, 어떤 이가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이 보였다. 픽시는 고개를 두어 번 휘저었다. 그이는 점점 픽시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픽시는 눈을 빡빡 비비고 다시 쳐다 보았다. 그이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데, 다가오다가…휙 지나쳐 고꾸라진 그 순간, 픽시는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같은 눈높이, 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 픽시는 말문이 막혀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해?

널… 보고 있었어. 너는……뭐야?

픽시.

네가, , 픽시야?

 

픽시의 앞에 나타난 또다른 픽시는 다시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다. 픽시는 당황스러웠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기도 빨이 이렇게 빨리 통하기도 하나? 대신 출근해줄 내가 나타난 걸까? 하지만 이내 또다른 픽시의 스케이팅에 매료되었다. 직선주로에서 대담한 발 뻗기, 부드럽고 가뿐한 코너링, 적재적소에 작동하는 어깨와 허벅지 근육. 문득, 그 장면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또다른 픽시는 한참이 지나서야 링크 밖으로 나왔다.

 

저기, 내가 픽시인데.

맞아, 너도 픽시지. 나도 픽시야.

어디가 아픈 걸까,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디서 왔어? 왜 왔어?

난 얼음에서 태어났는데.

우리가 똑같이 생겼어도 같은 이름일 수는 없어. 네게도 이름이 필요해. 지금부터 널 딕시라고 부를게.

딕시, 나쁘지 않네.

 

픽시는 딕시와 함께 링크장을 나서, 집을 향해 걸었다. 얘는 교통 카드는커녕 돈도 없을 테니까, 걸어가기로 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깰 겸 콧노래라도 부를까, 픽시가 흥얼거리려는 그 순간, 딕시가 선수를 쳤다. 픽시가 부르려던 바로 그 노랫가락이었다. 넌 참, 방금 태어났는데도 다 잘한다. 딕시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몇 발자국 가지 않아, 오늘 만나기로 한 홍대남, 건축남 둘에게서 연락이 왔다. 픽시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 두 명의 남자 중 한 사람에게 딕시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

 

너는 뭐 해보고 싶은 거 없어?

난 너라니까. 니 꿍꿍이 다 아는데.

네가 대신 나갈래?

난 방금 태어났다니까.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

난 방금 퇴근했잖아.

성장통인가, 막 쑤시는데.

퇴근통인가, 나도 힘든데.

너 지금 나랑 붙어보자는 거니?

 

픽시는 화가 난 척 했지만, 속으로는 내심 즐거웠다. 나와 대화하는 것은 이런 기분이구나. 딕시와 자신이 보다 유쾌한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둘 중의 누구에게 딕시를 보내야 할까? 나와 비슷한 홍대남에게 보낼 것인가, 내 상태를 잘 파악하는 건축남에게 보낼 것인가?

 

건축남.

?

건축남한테 내가 가겠다고.

?

걔 다른 사람 만나는 것 같댔지. 남자도 만날 걸.

? 너 남자야?

 

똑같이 생긴 픽시와 딕시…… 하지만 딕시는 남자였다.

딕시는 망설일 겨를도 없이 택시를 타고 건축남에게로 떠났다. 픽시는 어딘가 허망해졌다. 홍대남을 집으로 부르기는 했지만, 지금은 도무지 섹스 같은 걸 할 기분이 아니었다.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혹시 딕시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한담? 오지 말라고 해도 기어이 홍대남은 집으로 왔다. 보고 싶단 말이야, 오늘 안 보면 또 언제 보냐고.

홍대남은 픽시의 이야기를 차분히 듣더니, 무언가 검색해 찾은 것을 픽시 앞에 내밀었다.

 

도플갱어를 본 사람의 말로는 무척 비참해서 대개는 죽음을 맞이한다. 대처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은 안타깝게도 없는 것 같다. 어떤 경우는 자기 자신을 보았다는 충격 때문에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즉사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며칠에서 1년 이내에 서서히 몸이 망가지거나 혹은 정신적인 장애를 초래해서 결국은 죽음에 이른다. 자신의 정신이 파괴되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 어떡해? 어떡하긴, 네가 선수를 쳐야지. 아 또, 여자가 도플갱어를 봤다는 이야기는 없대. 왜지? 가설 일 번, 여자는 도플갱어를 인식하지 못한다. 본질적으로 같은 종이기 때문에. 가설 이번, 여성에 대해서는 도플갱어가 있든 말든 상관 없다. 어차피 여성은 같은 ‘기능’을 하므로.

픽시는 홍대남의 가설이 그럴듯하면서도, 기분이 상했다. 열심히 끓인 라면을 가져오는 홍대남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아졌다. , 집에 가. 라면 먹고 갈게. 지금 가라니까! 아니 라면만 먹고 간다니까!

홍대남은 제 분에 못이겨 라면을 엎어버리고, 집을 나갔다. 홀로 남은 픽시는 공연히 슬픔이 차올라, 울기 시작했다. 한참을 울고 있었을까, 딕시가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들어섰다. 울고 있는 픽시를 보며 잠깐 놀랐지만, 조용히 픽시의 곁에 앉았다.

 

별로였나봐.

.

그랬구나.

너는, 너는 어땠어?

좋던데.

 

좋던데, 좋던데… 픽시는 그런 말이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좋았다니? 처음부터 좋을 수가 있나? 아니 그래, 좋았을 수도 있지만 그 전에, 놀라지 않았을까? 딕시는 픽시와 똑같이 생겼지만 남자인데. 아니면, 남자라서 괜찮은 걸까.

 

걔가 뭐라고 울어. 울 일도 아닌데.

그냥 눈물이 나는 걸 어떡해.

그래도. 나라면 주저 앉아서 울지는 않을 텐데.

우리 앞으로 어떡해?

나도 몰라. 현재에 충실하면 미래도 있는 거지.

 

픽시는 눈물을 닦고 홍대남과 보던 창을 다시 켰다. 홍대남이 읽지 않았던 문장을 발견했다.

<간혹 예외도 있다. 괴테는 21세 때 도플갱어를 보았지만 83세가 될 때까지 장수를 누렸으며, 그 유명한 대작인 『파우스트』를 완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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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것이 취미라 말하는 이유는 한 사람을 택해 그이를 따르는 것이 즐거움을 주기에
찰리, 샘, 패트릭, 누구라도 따를 수 있는 영화라면 영화를 잘 만들어서일까 내가 이상한 것일까
슬픈 일을 충분히 슬퍼하고 미운 사람을 실컷 미워했다 그것이 헬렌 이모든, 양모 김옥이든
불편해하지 않고 더는 기대하거나 사랑하지 않고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했다
처음 학교에 간 날에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터졌다 그것이 옳은 일임을 아는데도
정신이 나간 채로 우는 내게 누군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뭐가 문제에요 잠깐 기다려요
홀로 몸을 가눌 수 있도록, 그칠 수 있는 울음을 내도록, 한 스튜어디스가 곁을 지켜주었다
신은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아름답고 상냥한 목소리를 가지고서
말을 해야 알지요 우리는 말하지 않으면 몰라요
여느 때와 같이, 대답할 수 없었던 나는 대답 대신 진과 사이다를 마시고 잠을 잤다
씨애틀은 흙먼지가 가득한 시골이 아니지만 나는 오랜 시간 꿈 같은 것을 꾸었고
그 속에서 신나게 뛰어다니느라 발이 새까맣게 변한 것도 몰랐다
그런 내 발을 보며 웃고 놀리던 사람들은 비행기가 이미 떠나온 곳에서 손을 흔들었다
웰컴백 컴백홈 홈스윗홈,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알았다 집은 돌아갈 곳이 아니라 끝이라는 것
사실 너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너 까불면 호적에서 파 버린다 집에서 내쫓아버린다
그런 농담을 하는 부모들은 짓궂지만 말 그대로 농담일 뿐이다 실제로는 하지 않기에
어렸던 나는 똑똑했지 사람이라면 나고 자란 곳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고 자란 곳을 버린 후에야 배운 점이 있다면 세상에는 타고나길 나쁜 사람도 있다는 것
이 세상이 애초에 그 따위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나는 성도 이름도 바꾸어야 했다는 것
어떤 사람은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그 정도 대가는 치러야 한다
인천행 국적기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 많아서 무겁고 무거운 것은 급속도로 하강한다
그 날 그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긴 내리막의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일과 같았다
내 덩치만한 짐을 안고서 뛴다 뛰면서 점점 발이 빨라지며 속도가 붙는다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눈을 떴을 때에 비행기는 착륙했다.

한국이었다.

집이었다.

늙어버린 엄마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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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도 그 여자는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나도 그 그림을 본 일이 있다. 그걸 처음 본 날에,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색칠공부라고 보는 편이 옳지 않은가 생각했다. 연하고 얇게 그려진 외곽선을 따라 그대로 줄을 긋고, 마음대로 색을 채워넣는 식이었다. 컬러링북이라고 하던가, 한국에서도 한때 유행했던 취미였다. 직장에 나가지 않는 날이면, 여자는 식탁에 앉아 색칠공부를 했을 것이다. 고요하고 평온한 집을 느끼는 데 그만한 취미가 있었을까 싶다. 값싼 색료에 일정량의 물을 부으면, 꽤 유사하지만 절대로 원작과는 같을 수 없는 색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든 색을 칠해 넣으면 꽃이, 어린 소녀와 소년들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색의 하늘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나는 그 여자의 취미생활이 그 여자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여자를 존중했고, 문득 그것을 떠올리면 부러울 때도 있었다.


그 날이 한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다음 날이었나. 나는 줄곧 걱정하는 친구의 집을 떠나, 텅텅 비어 적막할 지경인 지하철을 탔다. 4호선의 끝, 파리 북쪽 끝에 우리 집이 있었다. 이탈리아인 제시카와는 평소 필요한 대화 외에는 잘 하지 않았었는데, 그 때는 참 많은 말을 주고 받았다. 걔는 계속 울먹였고, 나는 그 애를 다독여주었다. 나보다 키가 두 뼘은 더 큰 애였다. 나는 어떤 급한 일이 있어서 꼭 나가야 하는 것처럼, 바깥으로 나갔다. Republique 광장에서 시위가 있을 거라는 기사를 봤고, 거기에 가볼 생각이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걔가 항상 조심하라고, 너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상냥한 애였다.

사람들이 놓고 간 애도와 추모의 글귀를, 촛불을 보았다. 동상 하나를 살펴보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대충은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내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반 쯤 알아들었다. 얼마 뒤에 사람들이 뛰었고,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어디로 가야하나요, 나는 모르니까 모른다고 답했다. 천천히 걸어서 집까지 갔다. 거기서 우리 집까지는 사십 분쯤 걸렸던 것 같다. 나는 외국인, 여자, 동양인, 외국인, 여자, 동양인, 그 말을 프랑스어로 줄곧 되새겼다. 그 때는 그 세 단어가 무슨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껏 병적으로 숨기고 싶었던 단어들이었다. 사실임에도, 발화하는 즉시 약해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달랐다. 그것들이 지니는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아빠는 내게 조심하라고 말했다. 그 잡종 새끼들은 어떤 일을 벌일 지 모르니까,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전화기 너머로, 나는 아빠, 여기서는 내가 그 잡종이야. 라고 말했다. 그리고 조심해봤자, 일어날 일은 어떻게든 일어나는데. 뒷말은 삼켰다. 

-

오늘 배우 김주혁이 죽었다. 좋아하는 배우였다. 그의 영화를 보며 시종일관 웃었던 기억이 난다. 교통사고였다. 집에 와서 그 영화를 다시 보는데 줄곧 눈물이 났다. 자꾸만 왜 우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울었다. 그 배우의 기사에 건조한 문장들이 만들어 낸 슬픔이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너무 많이 죽었었다. 그 날 쏟아지던 기사들이 만들어낸 문장에도 슬픔이 있었다. 어떤 일은 결국 일어나고야 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나는 줄곧 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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