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아빠는 니콘의 D90을 열심히 썼다. 나는 카메라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그것을 탐내며 만지작거렸다. 열일곱의 내게 D90은 충분히 컸고(매우 중요), 렌즈를 돌려서 줌을 당기는(더 중요), 그래서 뭔가 멋진 그런 카메라였다. 만질 줄도 몰랐지만, 아빠를 엄청 졸라 그 카메라를 빌렸다. 수학여행 때문이었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수학여행을 미국으로 갔다. 지금 생각하면 유학반도 따로 없던 우리 학교에서, 대체 왜 한 학년 전체가 아이비리그를 투어하는 것이 수학여행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 수학여행의 기록을 남기는 사진기자는 따로 지원을 받아 선발되는 식이었다. 사진? 내가 뭐 아는 게 있나. 하지만 내게는 아빠의 D90이 있지 않던가. 나는 꼭 DSLR을 들고 찰칵거리고 싶었다. 애들 앞에서! 물론 그 DSLR 카메라가 하루종일 목에 걸고 다니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알지 못해서 부린 객기였다. 웃긴 건 있는 건 장비뿐, 장비빨을 앞세운 내가 또 얼떨결에 사진기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와 함께 사진기자가 된 애는 다른 반 남학생이었다. 걔 이름도 기억난다. 걔는 아마 내가 카메라에 대해 쥐뿔도 모른다는 걸 단숨에 알아챘을 것이다. 왜냐? 10일여간 내내 오토로만 두고 찍었거든. 다른 걸 시도는 해봤지만 맘처럼 잘 안되길래 그냥 오토를 썼다. 취미든 업이든 카메라를 하는 사람이 들으면 기함할 일이다.

 

 아무튼 간지에 살고 간지에 죽는 열일곱에게 10일은 너무 길었고, 결국 그것이 문제였다. 여행 후반부 즈음, 왔다리갔다리 줌을 돌리는 것도 심드렁해져버렸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기조차 귀찮아졌다. 아빠의 소중한 카메라, 당시 100만원이 넘었던 렌즈는 결국 깨먹었다. 아빠가 얼마나 카메라를 애지중지하는지 알았기 때문에, 그걸 깨먹은 날 나는 밤을 꼬박 새웠다. 잠깐 잠이 들면, 카메라를 깬 것이 사실 일어나지 않은 일인.. 그런 꿈을 꿨다. 하지만 일어났을 때 여전히 내 침대에 놓여있는 렌즈는 박살이 나 있었다. 아빠가 엄청 화를 내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십년이 더 지나고난 지금에야, 그렇게 무서워할 필요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카메라가 너무 소중해서, 딸이 렌즈를 깨먹었다는 사실에 크게 분노할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카메라를 빌려주지 않았을 것 아닌가. 실제로도 카메라를 깨먹은 사실을 들켰을 때, 아빠의 반응은 덤덤했다. 왜 숨기려 하느냐고, 그걸로만 혼이 났다.

 

 그때 이후로 이렇게 비싼 카메라를 내 돈으로 사본 건 처음이다. 소중한 것들의 어떤 순간을 잘 남기고 싶다는 이유를 대면 믿어주려나? 나는 평소 물건을 다소 막 다루는 편이다. 남자친구는 그러다 고양이들이 결국 떨어뜨릴 거라고 몇 번째 경고하고 있다. 떨어뜨려도 뭐 어쩌겠나. 크게 상관 없다고 했다. 애초에 고양이들을 담으려고 산 카메라 아니던가. 십년 전 아빠도 비슷한 마음이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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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 년째 <닥치는 대로 해결>의 삶을 살고 있다. 시간 관리하는 법을 아예 잊어버린 것처럼, 마감이든 뭐든 끝에 이른 것들을 쳐내기에 바쁘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다른 사람들은 물론 나 자신도 만족시킬 수 없는 결과를 내게 된다. 개별적으로 생각해야 정신건강에 이롭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들을 한 데 모으는 나라는 사람에게 그 모든 실패가 쌓인다는 점은 부정 불가한 사실이다. 속에 ‘충분히 노력을 다하지 않았음’이 마구 쌓여가다보니 삶이 전반적으로 너무 불만족스럽다. 일괄 폐기처분, 리셋해버리고 싶은 병이 도진다. 밖에서 볼 때는 이것도 저것도 안 놓고 그런대로 잘 유지하고 있는 사람 같겠지만, 나 스스로는 알고 있다. 나는 딱 그 정도로 유지될 정도로 살고 있다는 점, 모든 것이 어떻게 유지될 만큼만 마음을 쏳고 있다는 점. 그 점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어 괴롭다.

전부 어영부영할 거면 아무것도 안 하고 속시원히 노는 게 나았을 거란 생각. 그런 생각의 고리는 발전 없이 되풀이된다. 속이 시끄럽다. 어딘가에 단단히 갇힌 것 같다.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 ‘이럴 거면 왜 @@해?’ 밖에 없다니. 처참하기 그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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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설명해도, 어떤 말을 덧붙여도 절대 이해받을 수 없는 순간이 있었다. 그런 순간이 얼마나 외로운지에 대해 떠들 때면, 나의 다정한 친구는 그런 상황은 대개 두 가지로 볼 수 있다고 정리해주곤 했다. 하나는 다소 오만하지만,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이 바보여서 잘 이해하지 못한 상황이다. 다른 하나는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의 성의에 관한 문제라고 했다.

 

 그 이야기는 꽤 위로가 되었다. 상대를 이해하고, 상대로부터 이해를 받는 일. 다시 말해 누군가와 이해를 주고받는 일이 결국에는 나와 상대방, 우리 둘만의 문제인 것처럼 여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망상으로 키워왔던 끝이 보이지 않는 외로움과 슬픔이, 사실은 정신을 놓은 채 들이붓는 물을 먹고서 미친 듯이 자라난 잡초와 다를 바 없다고 여길 힘을 주었다. 언제든 정신을 차리고, 과감히 뽑아내면 없어질 것들이라고 생각해보는 일도 가능했다.

 

 그러나 외로움이 극심한 날이면, 다정함도 부질없었다. 친구가 일러준 두 가지 상황도 쉽게 반론이 가능했다. 상대방이 바보여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끔 멀끔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그 전에, 내가 이야기를 건넨다고 해서, 듣는 사람은 항상 성의를 다해 귀 기울여 주어야 하는가?

 

 혹시, 이 이해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외로움이 앞으로도 수 차례 닥쳐오고 반복되어 끝내 나를 삼켜버리면 어떡하나.

 

 그 두려움에 짓이겨진 상태로, 나는 조승희의 희곡을 읽었다. 그 희곡 안에는 이해할 역량도, 성의도 없는 상대방을 붙잡고, 어차피 상대는 이해할 수 없으므로 더 이해할 수 없는 말들만 쏟아내는 인물들이 있었다.

 처음 연극을 접했을 때, 무대에 오르는 인물은 각자의 목표와 동기를 가지고 있으며, 목표를 실현할 수 없게 하는 장애물을 앞에 두고 그를 이겨내기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배웠다. 그렇게 만들어낸 인물이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배웠고, 그렇기에 그런 인물을 만들어내는 훈련만 꽤 오래 했다.

 조승희의 희곡과 조승희의 희곡을 읽는 이 극의 인물들은 예의 ‘살아있는’ 인물에서 먼 거리에 있다. 이해받고 싶어서, 또는 너를 이해하고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쏟아내는 인물들. 그들은 아무런 목표도 동기도 없어 보이는 ‘살고 있지 않은’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나의 지독한 어떤 날들의 모습을 닮았다.

 

 말하기조차 지겹고 지독하지만, 섣불리 누군가의 탓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나의 문제와 그 이유, 그것들에 갇혀서 허우적대는 일은 앞으로도 반복될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허우적대다 맞는 뻔한 상태, 상상 가능한 최악의 결말. 그 사이에서 지겹게 오가는 것 외에, 어떤 방식일지는 모르겠으나 조금 더 나은 날도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그리고 언젠가는, 정신을 놓고서 잡초를 기르던 나의 곁에 있어주었던 친구에게도, 조금 더 나아진 날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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