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정체 모를 합정 모임에 다녀온 해은이가 재미난 얘기를 해주었다.

콜럼비아 대를 나온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질문받자, ‘나는 투자도 하고, 어쩌고, 저쩌고하다, 결국 영어 학원 강사를 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거다.

결국은 영어 학원 강사.

그건 지나치게 모욕적인 표현이기도 하고, 뼈저리게 현실적인 단언이기도 하다.

나도 예전에 콜럼비아대를 나온 영어 학원 강사를 알았다. 그녀는 참 밝고, 똑똑했고, 상냥했다. 나에게 버츠비 립밤을 선물로 주기도 했고,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으면 ‘grizzly bear’ 같은 건 사는 데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filibuster’ 같은 걸 가리키며 이걸 외우라고. 이게 훨씬 중요하다고, 말해주기도 했다. 그녀도 영어 학원 강사였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를 졸라 그 사람에게 과외라도 받을 걸 그랬다. 그렇게 중요한 걸 알려주는 사람이었는데. 실제로 살면서 grizzly bear를 작문에 써본 일이 없다. filibuster는 한국에서도 보게 되었고.

NYC에서 공부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은, 그러니까 뉴욕 시내에 사는 유학생들은 한인 커뮤니티에서 자기를 소개할 때, ‘얘는 누구의 아들이야/딸이야’, 그런다고 한다. 해은이가 알던 콜럼비아 유학생 영어 강사는 매일 얼굴이 부어있었다고 했다. 알고 보니 지독한 알코올 중독이었다고. 내가 알던 유학생 중에도 알코올 중독이 많았다. 나 또한 파리에 있을 때는 매일 억지로 와인 한 병씩 마시고 자버리곤 했다. 그래야 살 것 같을 때도 있었다.

사람들과 어울려 놀다 보면, 합평을 받다 보면, 자주 발작 스위치가 눌러지곤 했다. 지나칠 정도로 상처받기도 하고, 공들여 숨기고 있던 발톱을 드러내기도 한다. 지금 이게 내 세상의 전부라서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그때마다 김수영이 썼던 왜 나는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가 떠오른다. 잘 살펴보고, 잘 돌아보려 하고, 잘 반추하고 싶었다. 내가 혹 잘못된 상대와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약한 사람을 만들어내는 데 최적화된 한국 교육 안에서, 어떻게든 나 같은 거라도 눌러서 커지려는 사람들에게, 휘둘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게 돌아보면서라도 안일하게 내 세상에 갇혀있지 않고 싶었다.

나는 유명한 누구의 딸이라서 어딜 가든 사람들이 궁금해할 만하지도 않고, 정신력이 존나 강해서 알코올 카페인 니코틴 같은 것에 휘둘리지 않을 수도 없고, 어디서든 반짝이는 재능을 갖고 있지도 않다. 이렇게 말하니까 정말 가진 게 단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문장을 쓴다고 해서 죽을 힘이 들지도 않고, 심장을 관통하는 저릿함도 느끼지 않는다.

이제는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어서, 나는 작은 말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아주 멀리 보고 가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고, 충분히 고쳐낼 능력이 있는 데에서는 상처받지 않으려고 한다. 잘못된 상대와 싸우느라 괜한 힘을 소비하지 않고 싶고, 누구라도 나를 약하게 만들 수 있도록 용인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살도록 나를 방임하지 않겠다. 결국 나는 나와 살아나가야 한다. 그러려면 나를 지켜야 하고, 조금 더 책임감 있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지금 나에게는 그런 것이 매우 중요하고, 절실하고, 챙겨야 하는 단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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