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도현의 어머니가 다녀왔다는 세상의 끝에 가본 적이 있다. 2016년 파리 생활을 마칠 즈음이었다. 800여 킬로미터 순례의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넘어, 삼 일 정도 더 가야하는 곳이다. 걸어서 다다라야 하는 곳에 나는 비행기로, 버스로 갔다. 그냥 궁금했다. 그때의 나는 알고 싶었다. 사람들은 왜 세상의 끝 같은 곳에 가고 싶어 하는지, 거기서 쉰내나는 자기 옷가지를 태우며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제 발로 걸어서 그곳에 다다르지 않은 자에게는 답을 허락하지 않는 곳이었다. 여러 가지 짐작할 수는 있어도,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옷가지 타는 냄새를 맡고, 지는 태양 앞에 이어지는 사람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세상의 끝>이라 쓰인 엽서를 샀다. 그리고서 파리로 돌아갔다. 며칠 후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탔다. 그때 내게 세상의 끝은 파리였는데, 그 말을 믿어주지 않을 사람들에게 대신 전해줄 좋은 이야깃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내게 이 작업은 <세상의 끝>에 다녀온 경험과 유사하다. 처음 작업 의뢰를 받았을 때만 해도 이렇게 몸집을 키워 나갈 것이라고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움이 커졌다. 작업자인 나조차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며칠 밤을 지새웠는지 모르겠다. 엄마를 논하기 위해 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지, 이런 방식의 글쓰기가 인터뷰이의 삶을 몇 자로 축약해버리는 것은 아닌지 혹은 실제보다 더 감상적으로 굴어 확장해버리지는 않는지. 그런 것들이었다. 이후 나는 이런 판단을 내렸다. 결과물을 내기에 앞서 이유를 고민하기보다, 이와 같은 우려를 최대한 줄일 수 있는 원칙을 세우자고. 첫 번째는 이미 공고한 가치에 동조하는 이야기는 쓰지 않겠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쓸데없는 위로와 감상적인 말로 지면을 채우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를 지키고자 최대한 노력했지만, 백 퍼센트 성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작업에 대해 스스로 던졌던 질문에는 답을 찾지 못했는데, 내가 걷지도 않고서 세상의 끝에 가고 싶었던 진짜 이유를 찾게 되었다. 세상의 끝은 나의 끝이며, 내가 끝나면 세상도 끝난다. 2016년 세상의 끝에 이른 기분이었던 나는 다른 사람의 끝도 보고 싶었다. 쉰내, 타오르는 연기, 조용한 울음 소리 같은 장면. 그 속에서 이야기를 읽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도시가 세상의 끝이었다고 말하면 믿지 않을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서, 다른 이야기를 빌려 와야 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터뷰를 받아보고, 그들의 삶을 다시 이야기로 쓰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우습게도 얼굴 한 번 마주보지 못한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마음이 여태 나를 힘들게 한다. 때문에 바라건대,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글을 덮어놓았으면 한다. 나는 당장의 내가 더 쓸 수 없을 때까지 썼다. 각각의 이야기들이 닿을 수 있는 끝에 이르렀기를 바란다. 그 자리에서 다시 삶이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모든 인간의 삶은 구술된 이야기를 넘어 실재한다. 나는 이야기를 사랑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것이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가 된 삶은, 특히 기이하고도 독특하고 불가해한 삶에 대한 이야기는 힘을 갖고 있다. 누군가 그들의 삶 혹은 이야기를 읽었을 때,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이해해보려는 용기가 생기기를 바란다. 용기는 의지로, 의지는 삶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므로.

 “내 삶도 이야기고, 네 삶도 이야기야. 성경도 이야기야. 모든 걸 이야기라고 생각하렴. 사람은 이야기가 있으면 살 수 있단다.”어느 오후에 그 말을 들었다. 지금의 내 기분을 그것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 빌려올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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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어느 일요일의 일기.

 


오늘 성당에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자매님, 그러다 벌 받아요.
당장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받아요. 


 내용만 따지고 보면 편지랄 것도 없는 작은 쪽지였다. 하얀 편지지에 두 문장만이 적혀 있었다.
그 문장을 제외하고서는 너무나 공허한 여백이 있었다. 그 공백은 말하고자 한 것보다 더 많은
무언가를 설명해주는 듯 했다. 모래사장에 적힌 다잉 메시지처럼, 목울대에 걸려 터져 나온 마지
막 유언처럼 정제되어 순수하고 솔직한 말. 많은 것을 적으면 정작 중요한 말은 뒤로 숨는다. 사
라진다. 삼키게 된다.
 나는 그런 말이 그리웠다. 그래서 ‘벌 받아요’, 가 천박한 조언이 아니라 순수한 말이라고 느껴
졌다. 어쩌면 나는 평생토록 그런 것을 지나치게 그리워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 미친 광신도
여자가 왜 그런 편지를 전해 주었는지는 알고 있다. 그녀는 우리 아이를 진지하게 걱정하고 있다.
아이는 요즘 종이 접기에 빠져 있다. 미사를 보면서도 열심히 종이만 접는다. 그 여자는 그것을
걱정한다. 나는 아이가 열심히 접은 육식 공룡, 외계인의 얼굴과 같은 것을 하나하나 펴 본 적도
있었다. 이제는 멸종되었거나 인간의 상상 속에서나 존재했던 것들. 그 안에 무엇이 적혀 있을까
봐, 나 또한 두근거렸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애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애가 아니다. 끔찍할 때가 있다. 사람들
머리에서 상상해낼 수 있는 최악의 상 같은 것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떠올려보면. 그 애는 그
런 애가 아니다. 지독하게 핍진하지만 슬프도록 조촐한 경험이 만들어낸 상상. 그 속에 갇혀버린
아이는 악을 쓰고 절규한다. 아이가 접은 어떤 것에도 활자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죽어 없어
진, 있지도 않았던 생물들의 외양을 모방한 것이 전부였을 뿐이다.
 그러한 상상이야 말로 죄악일 것이다. 가장 뻔한 것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인간이기에, 그런
상상을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같은 신을 믿는 우리는 신이 두려워하라고 가르친 죄악을 더 당
당히 저지르며 산다.
 나는 아이가 무언가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다고, 믿고 있다. 믿고 싶다. 그래야만 한다. 언젠가
아이가 원하는 색의 종이가 없어서, 내가 주말 저녁 연 가게들을 샅샅이 뒤져 색종이를 찾을 때
였다. 나를 사랑하는 이는, 내가 나의 아이를 위해 하는 행동을 마음 아파하며, 아이에게 원망의
말을 울부짖었다. 너는 뭐가 도대체 그렇게 힘들다는 거니, 왜 그렇게 죽을 듯 악을 쓰고 우는 거
니. 그들이 그리하는 것도 이해한다. 나는 그렇게 답했다. 그것은 그 아이의 죄가 아니라 나의 죄
라고. 누구도 그것을 죄라 말하지 않아도, 나는 그것이 나의 죄임을 안다고.
 아이가 접은 종이 안에 내가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잃어버린 것이, 그리워하는 줄도 모르고 그
리워한 것들이 있다. 아이가 그것을 그만두면 나는 아이가 죽은 것처럼 울지도 모른다. 아이가 완
전히 종이접기에 질릴 때까지, 끝까지 해냈으면 좋겠다. 죽어 없어진 것들을, 정말 있다면 대부분
의 인간이 졸도해버릴 만큼 무서운 것들을 접는 일을.
 요즘은 쉽게 잠에 들지 못해 아침까지 죽어라 버티다가, 낮에 쪽잠을 잔다. 그럴 때면 항상 같
은 꿈을 꾼다. 언젠가 친한 언니가 말해준 일과 유사한 꿈이다. 도저히 아이들을 키워낼 자신이
없어 죽으려고 떠났다던 드라이브. 그녀는 기어코 행하려 했던 바를 해내지 못했다. 대신 뒷자리
에서 잠든 아이들을 부둥켜 안고 엉엉 울었다고 했다. 드라이브 대신, 꿈 안의 나는 아이를 업고
광활한 모래사장을 내달린다. 거칠고 뜨거운 모래가 발을 할퀼 즈음, 속옷 안까지 파고든 모래 때
문에 온몸이 미친듯이 가려울 즈음. 등에 업은 아이를 모래 사장 위에 살포시 내려놓는다. 아이는
눈을 뜨고 있다. 눈꺼풀 위에 수북이 쌓인 모래 때문에 시뻘개진 내 눈을 마주 보고 있다. 바라만
본다. 무슨 말이라도 할 것처럼, 더듬더듬 입을 움직인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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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hodes는 빠리에서도 콘서트가 끝난 다음 오랜 시간 남아 관객 한 명 한 명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 나는 그를 지나쳐갔다. 그와 해야 할 스몰톡에 자신이 없었고(무엇보다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이미 열한 시가 넘은 시각이라 그맘때의 4호선에서 일어날 일이 두려웠기에.


 지난 타임라인을 훑어서 그 콘서트장의 이름을 찾았다. La Maroquinerie, 어려운 이름이다. 지금은 내가 그것을 제대로 발음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2016년 2월 5일의 나는 ‘모든 끔찍한 것을 잊게 만드는’그에 대해 적었다. 모든 것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던 때였고, 빨리 걷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아 종아리 앞에도 근육이 생겼었다. 하지만 2016년의 나는 그런 두려움 또는 바뀌지 않는 기질 같은 것 때문에 후회 없이 공연장을 나서는 사람은 못 되었다. 그렇게 나선 것은 어떤 확신이 있어서였다. 

 가장 최근에 본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데자뷔를 두고 시간의 배열에 오류가 난 것이라고 말했다. 무려 세 개의 시간이 얽혀 아주 골때리는 드라마였다. 인간의 모든 일은 우주가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 걸리는 33주기마다 반복된다. 그 33주기에서, 어떤 배열에 오류가 나면 데자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은 데자뷔가 다른 세계에서 보내온 메시지라 들었다고, 답한다. 어떤 오류든 메시지든 간에, 데자뷔가 있다면 그와 반대되는 것도 있다. 데자뷔의 반대는 미시감이라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데자뷔의 반대는 언젠가 다시 보게 될 것 같다는 이상한 확신이다. 그 이상한 확신을 신봉하고부터 나는 어떤 일에 집착하거나 연연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Rhodes의 공연장을 미련 없이 나섰던 이유, 그건 데자뷔의 반대였다.

 빠리의 소극장에서 본 그를 비 오는 날 홍대 롤링홀에서 다시 보게 될 줄 알았을까. 그 사실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참 이상하지, 어떤 사람의 목소리가 끔찍한 것들을 잊게 만든다는 것이. 너무도 흔한 것 같은 말이 음악이 되어 사람을 살고 싶게 만든다는 것이. 2년 전과는 달리, 오늘은 로즈와 빅 허그도 나누고 사인도 받았다. 다음번이 있다면, 그 언젠가에는 오늘을 잊고 데자뷔를 겪었으면 한다. 지나치게 끔찍하거나 두려운 것들이 옅어졌을 때 그냥,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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