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좋지 않은 신호, 나쁜 예감.




그녀는 즉각 웃음이 터져나왔다. 마치 그를, 그의 참모습을 얼마간 잊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지금 그녀 앞에 서 있는 그는 분명 예측 불가능하고 사랑스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그녀가 사랑하는 그 남자, 오랜 친구였다. 하지만 그것은 거북한 웃음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약간 미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축 가라앉았다가 그렇게 갑자기 돌변하는 감정을, 그런 기분을 경험한 적이 이제까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어떻게 보면 완벽히 이치에 맞고, 또 어떻게 보면-그럴 가능성이 상당한데, 그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완전히 터무니없는 제안을 하려는 참이었다. 그녀는 마치 자기가 삶 자체를 다시 만들어내려고 애쓰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실패할 게 틀림없었다.

 

p181


, 나 같아.

살면서 이 말을 여러 번 들었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해본 적은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굳이 이해해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이 말을 이해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고, 어쩌면 불가능하다. 방금 내 말의 어떤 지점이, 내 사고의 진전 과정 중 어디가, 아니면 나의 말하는 방식이 그랬다는 걸까. 고민이 이어질수록 답은 떠오르지 않고 머리만 복잡해진다. 그럴 시간에는 트위스트나 추고 열심히 노는 것이 낫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너와 내가 같아, 이건 일대일로 행동과 행동을 말과 말을 성격과 성격을 상정하고서 하는 말이 아니다. 쉽게 말하면 그냥 하는 소리라는 거다. 그런 맥락에서 이 글이 이해되었으면 좋겠다. 이것도 그냥 하는 말이다. 그것이 아무리 나의 진실과 맞닿아있다 해도, 나의 글이나 말이 다소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말도 글도 어차피 배출욕에 의해 움직인다. 이 글만 쓰고 나면 한동안 묵언 수행을 할 예정이다. 묵언 수행은 남의 말에 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말을 구태여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 근데. 그래서. 묵언 수행 전에 마지막으로, 이 글에서는 한 번 해보려고 한다.

, 나 같아. 라는 말이 내게는 어떤 의미였는지 설명해보는 일 말이다.

 

사랑이 뭐냐고 그가 물은 적이 있다. 그는 믿음이라고 말했고, 나는 시간이라고 답했다. 믿음이라고 답한 그는 확신이 있어야 추진할 수 있다는 맥락이었을 것이다. 나는 확신은 처음의 느낌이면 충분하다고 본다. 나는 세상의 기준과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규정하기로 다짐했다. 항상 살짝 삐딱선을 타는 내 기질과도 결부되는 문제다. 얼마나 살기 팍팍한 세상인데, 내가 만나고 좋아하는 사람들까지 세상의 기준에 맞춰 행동해야 하나. 그렇게는 갑갑해서 못 산다. 내가 사랑이라 여기는 감정 혹은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빌려오는 것이 쉽겠다.

프랑스어로 사랑한다, 'Je t'aime'이다. 여기에 부사 많이, 를 뜻하는 ‘beaucoup'를 붙이면 ’Je t'aime beaucoup'가 되는데, 이는 나는 너를 많이 좋아해, 정도의 의미다. 그러니까 부사를 붙이면 외려 감정의 단계가 한발짝 퇴보한다. 정도를 따지는 것은 사랑이 아니므. 누군가 그런 말을 덧붙이며 얘기해주었다. 프랑스어 사용자들이 정말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면서 ‘Je t'aime, Je t'aime,'하고 발화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일치하는 편이라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산다.

내게 사랑은 그렇다. 어떤 선을 넘는 것. 그 선을 넘고나면 무슨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나는 사랑이라고 여기며 산다. 분무기처럼 흩뿌려지는 간지러운 말들, 얼굴과 머리칼처럼 다들 가지고 있으면서도 꽁꽁 숨기는 나체, 그것을 상대에게만 보여주고 섞는 행위만으로는 쉽게 그 선을 넘을 수가 없다. 그러나 시간은 그 선을 넘기게 만든다. 아마도 세상이 말하는 이 그 선의 의미와 같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보다는 조금 더. 약간 더 나아간 곳. 그것을 성취하는 일이 내게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 나 같아. 를 느낀 순간 때문에 내 감정은 평소보다 빨리 사랑의 상태에 가까워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어떤 성향이나 행동들이 나의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십대 후반부터 프랑스 체류, 그리고 돌아와서 반년 즈음까지 이십대 초반의 일들을. 친구의 어머니는 종종 나는 얼굴에서부터 생각이 많은 게 드러난다고 말했다. 그전에 마음속의 무언가를 다짜고짜 꺼내는 일이 상대를 힘들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우쳤던 나는 스스로 꽤 잘 숨기고 있다고 믿었다. 그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얄팍했던 믿음은 산산히 부서졌다. 말하는 것도 답이 아니어서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생각이 많다는 건 결국 어떻게든 드러나는 일이었다. 특히 현명하고 지혜로운 나이 든 어른들은 그런 것을 바로 꿰뚫어 봤다. 아무리 숨겨도 끝내 간파당했다. 그 날 이후로는 숨기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날들에는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세 번, 그런 날들이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과 다시는 서로 엮이지 말자고 약속한 후에.

내가 뭘하고 살든 오늘이나 내일 총맞아 죽을 수 있단 사실을 깨달은 후에.

그리고 상대가 죽어버린 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더이상 미래에 관여할 수 없게 된 후에.

 

나는 그에 대해 더는 말할 의지도 생기지 않았고, 사실은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는지도 몰라서 포기했다. 그때 내게도 무슨 말이든 해주며 붙잡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런 것은 통하지 않는다고 밀어냈다. 아니, 행동으로 밀어내지는 않았고 마음속으로만 그렇게 여겼다. 그런데 아마 티가 났을 것이다. 그 또한 그랬다.

만약 그 날들의 내 상태가 지금 그의 상태라면, 또는 그와 유사하다면. 그런 질문이 들자 곧바로 후회했다. 말로 밀어붙이고 혼란 속으로 밀어 넣었다는 생각을 멈추기 어려웠다. 내가 가진 알량한 재주와 얕은수로 누군가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 나 같아 라는 말이 더 이상 방패가 되어주지 못했다. 나는 과거의 나를 봤고, 그 때문에 당신을 많이 아꼈다는 이유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다. 그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마치 어린 나를 떠올리는 일과 닮아 있었다. 돌아가서 꼭 안아주고 그렇게까지 힘들어하고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돼, 라고 말해주고픈. 그런 기분. 내가 그를 단기간에 아끼게 된 일은 그러니 결국, 과거의 나에게 갖는 감정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과거의 나 역시 언제나 삐딱선을 타는 사람이었다. 현재의 내가 그에게 돌아가서 논리정연한 말로 설득하고 감정적으로 의지할 기반을 내어놓는다 해도, 나는 짓궂게 굴었을 것이다. 제아무리 설득해도 못 알아 듣고 똑같이 그렇게 행하리라는 사실이 자명하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대로 그를 끌고 가는 일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 되어버렸다. 나는 구구절절 많은 말을 전하고 싶어 긴 글을 썼다. 처음에는 그대로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완성한 후 보내지 않고 그대로 삭제했다. 그 또한 다시 말로 밀어붙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자전거를 타고 한강 끝까지 내달렸다. 다리 언저리가 후들거릴 만큼 긴 거리였다. 처음으로 두 시간을 넘겨 초과요금을 냈다.


 

 

 

그러니까 네가 말하는 소설이라는 건, 진짜 소설 같은 거네?”

 

그런 말을 하며, H는 길게 풀어헤친 머리를 왼쪽으로 넘겨 빗었다.

 

그 뭐냐, <오발탄>, <김 첨지>, 그런 거.”

 

나는 입을 움직이다, 이것이 성급하고 충분치 않은 답이라는 생각에 곧장 다물었다. 대신 한 몇 초간 포크를 만지작거리다 그래, 그런 셈이지, 하고 그 순간을 넘겼다. 그런 내 모습이 아주 불성실하다는 생각도 잠깐 스쳤다.

<오발탄>, <김 첨지> 같은 것.

고등학교 졸업 이후 오랜만에 들어본 이야기였다. 한 번쯤 학과 선후배들이나 동기들과의 술자리에서 우스갯소리로 나오지 않았다면, 아마 처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술자리에서 보낸 시간들을 그리운 것들로 회상하기에 아직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촉발된 이 이상한 향수와 H에 대한 환멸 같은 것은 미뤄두었다.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 다시 그 사람들을 만난다면, 그때 이 상황을 말해줘야지, 꼭 잊지 말고 기억해서 한 재미 봐야지 다짐했다.

H와의 약속은 내게 늘 예정된 실패, 실패의 연속 같은 것이었다. 나는 길거리를 걷다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 그녀와 약속을 잡고, 그날 잠자리에 누워서는 대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자책했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면 미룰 수 있을 때까지 침대에 엎드려 있다가, 돌연 벌떡 일어나 문을 나섰다. 그러니까, 나는 H를 만날 때마다 이상한 모순에 시달렸다. 그녀와 함께 이야기를 할 때면 도무지 말이 안 통한다고 느꼈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이야기를 뱉을 수 있었고,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각오를 해놓고서는 매번 흥미로운 장면을 낚아채곤 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같은 학교의 유학생인 우리의 행정적인 일을 봐주는 교직원에 대한 주제가 등장한다. 자기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고려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입 밖에 꺼내지 않을 말을, H는 서슴없이 뱉었다.

 

그 여자, 어딘가 좀 재수없어.”

 

, 냐고 물으면,

나한테는 틱틱 거리다가, 남자하고는 웃으면서 얘기하잖아. 그리고,”

 

그리고? 하고 받아치면,

학교 직원이 옷을 너무 야하게 입어. 입술도 시뻘겋게 칠해선. 가슴도 막 터질 것 같애.”

 

H의 이야기가 그 정도까지 진척이 되면,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 몇몇은 몰래 눈길을 주고받았다. 우리중 누구도 H의 그런 말들에 대해 따로 코멘트를 붙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H가 입을 뗄 때면 나머지 사람들의 관계는 어딘가 가까워지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나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은, H가 답하는 데 별 무리 없을 법한 질문들만 던졌다. 그러다보니 다 같이 모이는 자리에서 대개 질문은 그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질문을 하면, 그녀의 답보다 그의 질문 자체가 더 화제가 되었다. 간혹 그녀에게 현재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이는 배려심 없고 난 체하길 좋아하는 인간으로 낙인찍혔다. H가 다른 무엇보다 자신 있어하는 다이어트나 운동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라면, 부드럽고 상대방에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라는 좋은 인상을 획득할 수 있었다.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을 알아갈 수 있다니, 이건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흥미로운 관계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상냥한 편이었다. 그리고 다른 말로는 H에게 아무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는 부류라고 할 수 있다. 나는 H와 대화를 할 때, 우리가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한 발 진보할 겨를도, 뒤로 퇴보할 일도 없는 단조로운 이야기를 찾아냈다. 높낮이가 없고 정체된 순간 하나만을 적시하는, 그런 이야기들에 머무르며 시간을 밟아나갔다. 그런 것들은 서두르지도 질질 끌지도 않으면서, 아주 일정한 속도로 초침을 진척시키는 데에 효력이 있었다. 어떤 답이 돌아올지 뻔한 질문을 던지는 일. 항시 번뜩이는 순간들만을 기다리던 내게 그 행위는 묘한 쾌감을 안겨 주었다. 단 한 번도 내가 그런 것을 잘해낼 것이라 기대해보지 않았던 터였다. 언젠가 일상의 단란함 같은 것만을 즐기며 긴 생을 살아가야 한다면, H와 같은 사람은 그런 생에 꼭 필요하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먼 타지에서 H 같은 사람과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면 기염을 토할 얼굴이 몇몇 있었다. 네가? ? 같은 어구들을 힘껏 던지면서 말이다. 그에 대한 나의 답은 다음과 같다. 그러게, 내가, , 여기까지 와서. 아무렴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말이다. 한국에서도 만나보지 못한 어떤 당황스러울 정도의 멍청함과 무지몽매의 집합체 같은 것을 여기에서 가까이할 것이라고는 나도 예상치 못했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 한국에서 악착같이 자잘한 것들을 버려왔던 것은 결국 여기에서 진짜배기 하나를 얻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같은. H는 어느새 그런 존재가 되었다.

 

어찌됐든 벌인 일에 책임을 지는 것이 어른이고, 누군가 정해놓은 기준에 따르면 나도 어엿한 성인이므로 H의 질문에도 답을 해야 했다. 이 주제가 한국에 두고 온 친구들 사이에 던져진 것이라면 이야기는 아마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오발탄>, <김 첨지>라는 말이 맥락상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만 기억하는 사람들과 함께였다면, 우리는 한바탕 실컷 웃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H의 물음에 나는 내가 기억하는 오발탄과 김 첨지가 무엇인지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다른 이들과의 대화에서는 <오발탄><김 첨지>가 발화되는 순간의 분위기를 쉽게 짐작했는데, H와의 것에서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말하는 <오발탄><김 첨지>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그것이 내가 알던 만큼의 웃음기와 진지함을 담고 있기는 한지 가늠조차 하지 못했다. 거기에는 어쩌면, 그녀가 나보다 훨씬 더 <오발탄><김 첨지>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속속들이, 정말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자리하고 있었다.

'Those days' 카테고리의 다른 글

05 février 2016 à le Musée national Picasso-Paris  (0) 2018.06.19

 

 

1900 Picasso voyage a Paris pour la premiere fois et s’y installe en onctobre en meme temps que son ami, l’artiste Cosagemas, don't le suicide marque le debut de la periode blueue..

 

 

*한 벽면에 비슷해보이는 세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 중 하나에는 ‘2,1,55’ 일자의 사인이 그려져 있었다. 피카소는 12일 같은 날에, 모두들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그런 날에 이전부터 그려온 그림을 완성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같은 소를 다른 모양으로 바꾸는 세 편의 연작을 의도했을까. 그림은 6일과 10일 간격으로 하나씩 완성되었다. 선밖에 남지 않은 황소에게도 같은 양의 그림자를 그려준 것이 눈에 띄었다. 1900년에 죽었다는 그의 친구 이야기를 접하고 나자, 저 소나 소의 그림자 모두 그의 친구처럼 보였다. 그가 붓터치 어디에나 그의 친구가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그가 별달리 신경 쓰지 않고서 만든 가이드라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그 전부터 윤곽이 강조된 그림을 그려왔으니까. 어쩌면 후대에 이 그림을 보고 있을 나 같은 사람을 두고 장난을 쳐놓은 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이미지를 기대하는지 확실히 알고 난 이후에 생산하는 것들. 나는 50, 60년에 피카소가 그린 것들을 본다. 그런데 거기에는 윌리엄 터너나 르누아르, 모네에게서 보이던 어떤 독특한 종류의 인상은 없다. 그림의 여자들은 르누아르처럼 지루해하지도, 모네의 수련처럼 모든 색을 먹어버리지도, 터너의 흐린 하늘처럼 거장의 색채처럼 보이게 해줄유리가 씌었다는 인상도 없다.

 

 

***나는 43년 이후 시 같은 것은 쓴 적이 없어.’

1895. L'homme à la casquette

그 유명한 천재의 어린 시절, 열다섯에 그렸다는 유화였다. 그림은 상대적으로 작았고 색채 또한 어두웠다. 바로 옆에는 <Maternite>라는 71년에 완성한 그림이 있었다. 컸고, 초록과 잿빛으로 가득했다. 80년의 시간이 30cm의 간격을 두고 걸렸다. 나는 피카소가 어릴 적 배운 대로, 그러니까 1890년대의 붓질로 그리고 싶은, 그릴 수 있는 사람이 이후 그에게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스물 한 살 여름, 1901년 여름, 그는 친구 Casagemas의 죽음 이후 진녹빛 수도관 같은 색으로 그의 얼굴을 그렸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흔들렸다. 피카소의 ‘Bleue’period라고 일컬어지는 시기 역시, 다른 어떤 화풍 보다도 어쩌면 그가 아주 많이 흔들렸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피카소는 1905년부터 여자를 그릴 때 돼지에게서나 찾아볼 법한 분홍색을 썼다. 나는 그것이 여자를 화나게 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피카소를 떠났다. 아무리 대단한 예술가의 뮤즈가 된다고 해도, 돼지를 그릴 때나 쓰는 분홍색으로 아내를 바라보는 것을 참을 여자는 세상에 없기 때문에.

1905, 그날 이후로 그는 더이상 예전 같은 그림은 그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 여자가 마지막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정말로 그림다운 그림만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성공하기 위해서, 유명해지기 위해서,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 그때쯤 친구는 죽고 여자도 떠나 주었다. 마침 그런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었을까. 딱 한 번 예외가 있었다면 1918년에 그린 Olga의 초상화였다. 그녀는 성공을 위해 쓰이기엔 너무도 예쁘고 사랑스러웠으며, 필요 이상으로 친밀한 여자였을지도.

'Those days' 카테고리의 다른 글

13 décembre 2015  (0) 2018.06.2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