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파트너› 의 장면

연습이 한창이던 어느 금요일, 한 시에 시작하는 연습에 앞서 열두 시쯤 세정(전문사 연기과 15)과 먼저 만나서 작품에 대해 얘기하기로 했다. 그와 나는 2018년 여름 ‘돌곶이 인큐베이터 워크숍’에서 작가와 배우로 만났다. 지난 여름에 이어 다시 인큐베이터 워크숍에 참여했다는 그가, 어떤 작품으로 이 겨울을 보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전날 그가 보내온 ‹파트너›의 대본을 읽었다. 1월 25일, 연습 3주차 즈음이라는 그 날까지 정리된 것만도 50장에 가까운 적지 않은 분량이었다. 총 6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이야기, 이 6이라는 숫자는 ‹파트너›의 무대에 오르는 배우의 숫자 여섯 명과도 일치했다. 처음 만났지만, 어딘가 익숙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들. 대본에 쓰인 여섯 개의 배우 이름에는 아는 이도, 전혀 모르는 이도 있었다. 이름의 주인들이 어떻게 이 이야기를 그려낼지 헤아리는 동안, 나는 짧게 웃기도 하고 울컥하는 마음을 다스리려 목을 가다듬기도 했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자연스레 각 에피소드마다 등장하는 ‘파트너’라는 배역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여섯 개의 이야기들은 그들이 다루는 소재와 내용이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다가 파트너라는 배역이 등장함과 동시에 하나로 묶이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런 고민이 이어지고 있을 때 쯤, 지난 여름 공연에서 파트너였던 세정이 카페로 들어왔다. 

돌곶이 인큐베이터 워크숍
여름과 겨울 방학마다 연극원 학생들이 통칭 ‘인큐’, ‘야합’이라고 부르는 공연이 올라간다. 두 프로그램 모두 연극원 학생들이 학과 수업에서 벗어나 직접 창작하고 다양한 실험을 통해 공연을 준비한다. 소정의 제작비와 무대를 지원받고 발전 가능성이 있는 작품이라면 후속 지원을 받는 혜택이 있지만 대본부터 시작해 스탭 구인, 무대, 소품까지 모든 것을 학생들 스스로 해내야 하기에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나의 경우에만도, 1학기 종강 후 한 달 반은 인큐 준비와 함께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 여름이 지독하게 더웠는지도 제대로 기억이 안 날만큼 바쁜 한 달이었다.

세정은 연극원 재학 중 총 세 번의 인큐 공연에 참여했다. 그런 그가 생각하는 인큐의 첫 번째 장점은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인큐 선정작은 대부분 순수 창작물이거나 기존의 작품을 재구성한 것이다. 초연의 일원으로서 작품 개발에 참여하며, 작품을 만드는 새로운 방식을 배운다. 그것은 오랜 기간 작업을 해온 세정에게도 늘 흥미로운 일이다. 공연을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곧, 새로운 배움이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서 나 역시 연극원에서 배운 바이기에 크게 공감했다. 

힘든 점이라면 응당 적은 제작비이지만, 인큐 자체가 작품 개발과 발굴에 성격을 두고 있으니 공연보다는 개발 전 단계라 여기면 그 또한 납득할 만하다. 그럼에도 60만원이라는 제작비에 맞추기 위해 공연을 빈 무대에서 올릴 수는 없으니, 무대나 소품에 있어서는 기술적인 지원이 주어지면 한결 나을 것이다. 이전 학기 공연의 소품들을 재활용할 수 있도록 목록화되어 있다면 혹은 제작사의 구 세트들을 지원받아 이를 바탕으로 준비하는 공연이라면 어떨까? 무언가를 구체화하고 키워낸다는 ‘incubate’, 기술과 아이디어를 실험해보는 장인 ‘workshop’의 이름을 따르는 데에는 조금 더 보완되어야 하는 지점이 필요하다. 계속해서 유지될 프로그램이라면 짧은 준비기간 작업 진행이 더뎌지지 않도록 이를 도와주는 기술적인 풀이 갖춰져야 한다는 데에는 아마 모든 연극원 학생들이 동의할 것이다. 


협업자, 동기, 친구, 파트너…
전문사 연기과 15학번 네 명, 전문사 연기과 17학번 한 명, 예술사 연기과 09학번 한 명 으로 이뤄진 ‹파트너›의 배우진들. 오십여 장의 대본이 무색하게, 세정이 처음 꺼낸 말은 처음부터 ‹파트너›를 공동창작으로 진행할 생각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함께 연극원 과정을 수료한 동기이자 오랜 친구들이 마지막 방학에 무얼 하든지 함께 해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 시작이었다. 

세정이 섭외한 극단 작은 방의 신재윤 연출은, 그들에게 공동창작을 제안했다. 문제는 ‘무엇’을 창작할 것이냐는 지점이었다. 커피숍에 앉아 한창 고민이 이어지던 중 던져진 화두는 ‘관계’였다. 그렇게 ‘파트너’라는 이름이 그들의 화두로 던져졌다. 

그들은 파트너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가 삶 속에서 만나는 모든 관계를 이야기해보고자 했다. 그렇게 각자에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지만 중요한 관계, 항상 생각하지만 해결하지 못하는 파트너들을 떠올렸다. 그렇게 준비해온 자신만의 에피소드들이 이야기로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극 중에 등장하는 ‘파트너’라는 배역은 탈을 쓰고 등장한다. 원래는 ‘바야바’와 같은 다소 의미심장한 이름이 있었지만 이내 그 의미를 배우들이 관객의 손에 직접 쥐어주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해 그 이름을 버렸다. 그저 ‘파트너’라는 이름으로, 개개인의 삶에 꼭 하나씩은 존재하는 이들로 다가가기를. 관객에게도 그 탈 너머에 있는 자신만의 파트너가 보이기를 원했다. 

오히려 작업 초반에는 ‘파트너’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정리되었던 것 같은데, 진행되면서 점점 명확히 해석하기 어려워졌다. 이는 ‹파트너›의 이야기가 더 풍성해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바깥으로 끌어내주는
또는 나에게 이야기를 심어준 이들

작업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극작의 기본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일단 ‘써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세정은 기본적인 극작에 대해 한계와 갈증을 느꼈다고 했다. 가장 솔직한 말을 하자니 무대 위에서 너무 유치하게 느껴질까봐 부끄러웠고, 계속해서 바꾸어도 충분히 정제되지 않고 터져나간 말들이 눈에 밟혔다. 세정은 ‹아버지의 기억 훈련›이라는 대본을 썼는데, 이는 그가 가장 하기 싫은 자신의 이야기였다. 

세정의 안에는 아버지가 심어준 관계성에 대한 화두가 있었다. 자기 얘기를 하자니 자의식이 개입하고, 무대 위에서 청승을 떠는 것처럼 보일까봐 도저히 못하겠다고 여러 번 말했다. 

내 이야기를 하니 자꾸 과거로 돌아가는 것 또한 괴로운 일이었다. 그런 세정에게, 신재윤 연출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세정은 해냈다. 이를 해내기까지 3주동안 그들은 줄기차게 ‘대화’를 했다. 이는 세정 외의 다른 다섯 명의 배우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직 과거에서부터 무대로 이야기를 완전히 빼오지 못한 친구들을 위해, 세정 또한 그들과의 대화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어떤 이야기를 쓸 것인가, 어떻게 쓸 것인가. 서로에게 느끼는 편안함 덕분에 이를 진심으로 들어주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에, 이야기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태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세정에게는 파트너가 어떤 의미일까? 그는 ‘내 것을 나눠주는 일’이라 답했다. 이런 답을 알려준 것은 삶에서 깊은 관계를 맺었던 경험들이었다. 물질적인 것을, 혹은 마음을 준다거나, 홀로 그 사람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거나 하는 일들. 온전한 나의 것이라 치부되던 나의 몸과 나의 시간을 할애해 상대방에게 쏟는 일. 그런 일을 하고 나면 세정은 그의, 그리고 그 역시 세정의 ‘파트너’가 되었다. 


무대 위에서, 
기꺼이 서로의 파트너가 된다는 것

연극 작업 안에서 ‘파트너’라는 개념은 어떨까? 세정은 작업하는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일은 결국 ‘피치 못한 희생’이라고 여태 생각해왔다. 공연을 올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나의 노력과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맞지 않는 사람이어도 맞춰가야 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작업이 흘러가더라도 여전히 마음을 쏟아야 한다. 작업에 참여하는 그 누구도 자기가 원하는 100퍼센트를 실현할 수 없다. 결국 개개인이 조금씩 희생한 것들이 모여 하나의 공연을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한편 요즘 들어서는 ‘희생’이라는 단어가 목 언저리에 한 번씩은 걸린다. 우리가 꼭 ‘희생’을 해야만 하는 걸까? 지금 이 단어를 꺼내며 나 또는 내 옆 사람의 감정이 불가피하게 희생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절대 맞지 않을 것 같은 사람과 마음을 맞춰보려는 노력, 서로의 욕심을 조금씩만 내려놓고 조율해가는 일이 대단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러한 희생이 수평적 관계 안에서 일어날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인 것 아닐까, 하는 나의 말에 세정은 잠시 생각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작품을 할 때면 항상 느끼는 바가 있다고 했다. 연극이, 공연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실제 삶 또한 이 정도로 살아내지 못했을 것 같다고. 작품이 잘되지 않으면 계속해서 곱씹고 반성할 수 있었고, 작품이 잘 되면 기분이 좋아지고 자신감이 차올랐다가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맨땅에 헤딩’식으로 시작했는데, 우려한 것보다 굉장히 잘 나온 것 같고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배운다’는 것이 연극을 계속하게 만드는 이유일까. 

‘잘 될 거예요, 여름에도 어쨌든 공연은 잘 올라갔잖아요.’ 하는 나의 말에 그는 웃으며 핀잔을 준다. ‘에이, 여름 인큐는 아무 생각 없이 하니까 좋았지.’ 여름에도 우리는 똑같이 ‘맨땅에 헤딩’이었던 것 같은데. 금세 잊고 웃는 세정을 보며 그는 다른 이에게 참 좋은 파트너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트너’가 된다는 것이 그의 말처럼 ‘피치 못한 희생’을 담보로 한다면, 좋은 파트너가 되기 위해 한 계절쯤은 기꺼이 희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글 신소원

ⓒ싸우나스튜디오 김경수

한해를 자평하기에는 아직 이른 11월의 오후, 연출가 윤한솔 교수를 만났다. 무언가의 끝 앞에 설 때면, 시간의 구분이 인간의 자의적 단위이며 어차피 우리는 항상 연속되는 시간 위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그 때문에 자평 혹은 마무리가 부질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윤한솔 교수의 2018년처럼, 지금도 새로운 도전과 작업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면 더욱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생각 또한 인간의 자의적 판단이라 투정해보며, 매겨지는 숫자를 잠시 멈춘 채 유의미한 방점들을 함께 짚어보았다. 궤적을 발견하기 위해.

2018년의 시작-연극원 교수로서, 예술감독으로서
연극원에 오는 것이 계획에 없던 일이어서, 2018년에 잡혀있던 일정과 맞물려 본의 아니게 굉장히 바빴어요.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는 그동안 연출들이 하지 못한 형식적, 미학적 실험을 기획했어요. 국립극단 선언문의 내용과 형식 안에서 연극과 극장의 공공성·동시대성을 논하고 각자의 작업이 이에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지점에서 만나는지 네 편의 쇼케이스를 진행했죠. 연극원 교수는 독립된 전공으로 학생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연출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가르치고 싶은 욕망이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자리같아요. 운 좋게 오게 돼 더할 나위 없이 좋고요. 바쁜 동시에 조용히 지나간 한 해였다는 느낌도 들어서, 올해가 지나가야 자평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술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
단답형으로 답한다면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예술교육이 실행을 위한 기술과 영감의 영역으로 크게 나뉜다고 보면, 전자는 기술 숙련을 목표로 가르칠 수 있어요. 하지만 후자는 학습에 의해 가능한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전자를 제대로 가르치는 것, 그리고 영감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예술교육의 한계이자 해야 할 일이겠죠. 저는 예술이 경험을 확장해서 새로운 소통양식을 구현하는 독특한 사회활동이라 생각해요. 개인이 개인에게, 또는 집단이 집단에 한결 근사하게 보이거나 경이로운 경험을 하게 하는. 그래서 예술교육 또한 한 명의 예술가를 양성하는 것과 함께 조금 더 아름답고 즐겁게 살 수 있는 소양을 가르치는 문제 같기도 해요. 개인적으로는 ‘나는 가르치고 너는 배운다’는 전통적인 프레임을 벗어나서, 연극 교육 안에서의 관계 자체를 다르게 정립하고 싶어요. 그 대안을 학생들과 함께 모의해야 하는 시절이라고 생각해요.


‹1984› ©두산아트센터

도전, 그리고 상상할 수 없던 변화
대학원을 연극영화과로 진학한 후에는 부족하고 엉성했던 연극반에서의 공연과는 달리 좀 멀쩡한 프로덕션을 경험해보고 싶어서 뮤지컬 제작사에 찾아갔어요. 연출부로 몇 년 일하니 프로덕션 경험은 쌓이는데 여전히 연출은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고, 이게 정말 내가 하고픈 일인지 의문이 들었어요. 환경을 바꿔보고 싶고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에 뉴욕으로 유학을 갔죠. 학교 2년에 극단 생활 3년을 합쳐 5년간 있었는데 2000년에 9·11 테러가 일어났죠. 집에서 조금만 걸어 나가면 분진이 날려오는 거리에 살다 보니, 책과 영상으로 숱하게 접한 것임에도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 생겼어요. ‘얼마나 미우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내가 죽으면서,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지?’ 그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물어서 당시 2~3년간은 짧은 시간 가장 많은 책을 읽으며 공부했죠. 말 그대로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노트에 ‘얼마나 미우면’을 수도 없이 적었어요.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얼마나 미우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저 자신이 인간의 본성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줄 알았는데, 아무리 미워도 그럴 수 없다는 아주 옅은 바람이 생긴 후 분노와 미움은 중요한 화두가 되었어요. 잘나가는 유명한 연출가가 되고 싶었던 바람이 사라지고 연극하는 이유가 달라졌죠. 그건 제게 상상할 수 없던 변화였어요.

연극을 한다는 것
어떤 예술 장르든 각자 고유한 속성이, 그 장르가 구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만드는 연극을 필요로 하는 이가 분명히 있다고 믿어요, 막연한 믿음이지만. 직업은 일정한 일을 하고 일정한 보수를 받아 삶을 영위하는 것인데, 연극은 그게 쉽지 않으니 독특한 사회활동이라 말하고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우리 삶보다 크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어쩌면 세상을 다르게 보도록,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지 않나 기대해요. 저는 극장에서 평소에 보지 못한 풍경, 언어를 경험하며 우리가 서로를 조금 다르게 인식할 때 경이로움을 느껴요. 극단 작업 시에 수행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 참여한 사람들이 그 과정 안에서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목격하는 건 항상 근사한 일이죠. 그런 점에서 연극, 예술을 한다는 건 삶에서 작은 숭고함을 느끼는 일 같아요. 제게 있어 연극을 한다는 건 혁명의 차원이라기보단 현재까지 지속되는 과거들을 조금씩 바꾸는 일에 가까워요. 닫혀있던 창문을 조금씩 여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일에 가깝고, 작업을 통해 열수록 빛과 온도가 점점 절박해지니 마지막에는 다 열릴 때까지 하는 거죠. 어떻게 보면 지엽적이고 소극적인 이유지만 정치적 책임감보다는 지금 제 머리와 몸이 느끼는 불편이 동력이에요. 늘 이만큼 열었던 창문을 갑자기,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못 열게 한다면 다시 문을 열고 싶어지는 거죠. 꽤 오랜 시간 연극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해왔고, 시의성이 저를 규정하는 하나의 정체성이 되었다는 점을 최근에 실감하게 됐어요.


‹인터넷 이즈 씨리어스 비즈니스› ©두산아트센터

실험성, 난해함보다는 낯섦에 가까이
모든 예술에서 새로움이 일종의 존재 이유처럼 여겨지는 것 같아요. 저도 스스로 무엇이 새로운 것인지 질문하고, 관객에게도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언어를 던지려 해요. 새로운 것을 던졌는데 모두가 이해한다면 새롭지 않다는 반증이겠죠. 이렇게 작업을 하다 보니 관객이 공연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는 결론이 생겨요. 그럼 ‘관객이 이해하지 못하는 공연을 왜 하는 거지?’라는 질문이 또 이어지는데... 결국 공연 한 편을 만드는 것은 새로운 의사소통 가능성을 제안하고 그에 적극적으로 응하고픈 누군가를 만나는 일인 것 같아요. 난해하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난해가 아닌 낯섦이라 생각해요. 관객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말도 나오는데, 저는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은 말걸기로 보다 적극적으로 관객을 만나고 싶어요.

실패의 후일담
무언가 궁금해지고 의문을 갖는 순간, 그런 자기 관심사를 공동의 관심사로 발전시키면서 대부분의 작업이 시작돼요. 이후 구술증언이나 참고자료를 ‘채집’해 텍스트를 만들고, 장면화할 방안을 고민해요. 그러다 보니 기존의 연출 언어나 관습과는 구조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이 생기는 것 같아요. 10년 이상 작업하면서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적이 없는데, 그래서 역설적으로 저나 제가 속한 단체의 미학과 고민이 흐트러지지 않았어요. 한 작품이 큰 성공을 거뒀다면 그 노하우를 따랐을 텐데, 그렇지 않으니 매번 새롭게 하겠다는 욕망이 유지되었던 거죠. 저희는 합평을 ’실패의 후일담‘이라고 부르는데요. (웃음) 관객이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말을 걸고 있으니 성공할 리가, 성공할 수가 없는 거죠. 다 알아들으면 의도에 맞지 않으니까, 관객들이 좋아하고 많이 왔다면 정말 대실패인 거예요. (좌중 웃음) 실패의 후일담이라지만 의도를 생각하면 대부분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이런 이야기는 오독의 여지가 있어 조심스럽지만, 그렇게 제 작업이 설명되는 것이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기도 해요.

창작집단, 협업 그리고 공동창작
학생들에게 종종 얘기하지만, 최근 연출가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바쁜 사람들을 한 공간에 다 모으는 거예요. 그래서 매력 있는 작업의 구상과 설득력 있는 과정 설계가 중요한 덕목이 되고 있어요. 결국 하나의 이상과 미학을 바탕으로 공동체를 만드는 게 어려워졌다는 방증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연극에서는 일정 기간 같은 구성원들이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과정을 공유하면서 만들어내는 언어와 미학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봐요. 천재가 나와 판을 좌우하던 시대는 지난 것 같아요. 그래서 공동체가 지속하며 만들어내는 언어와 미학은 사유하는 방식으로서의 대안, 혹은 다른 패러다임이 될 수 있겠죠. 공동창작은 1인의 혁신적인 작품보다 집단적인 사유가 결론으로 도달하는 과정을 중시하는 작업 양식이니까요. 고전적인 서사와 기승전결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아 낯설 수도 있지만 그만큼 아직 박제되지 않은, 살아있는 언어를 만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기존의 연극 경험과는 다른 경험을 하게 되겠죠. 뿐만 아니라 십년 째 함께 작업하는 배우들도 긍정적으로 변화해가는 모습을 봐왔어요. 물론 저를 포함해서요. 비겁하지 않은 유연함, 경직이 아닌 단단함으로.


‹호신술› ©국립극단

2018년, 외적 성취와 내적 고민들
2018년은 제게 중요한 해인 것 같아요. 공무원이 되었고(웃음), 예술감독으로 일하는 등 도전과 고마운 일이 많았어요. 외적으로는 성취한 것들이, 내적으로는 고민이 많은 한해였어요. 미투 이후 일종의 변혁기를 겪으며 질문을 거듭하고 있어요. 솔직하게 아직 마땅한 실마리를 찾지 못한 것 같아요. 과거에 재밌게 읽었던 소설이 더는 그렇게 읽히지 않고, 희곡 안에서 여성혐오와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눈에 띄기 시작하는데... 이건 이전에 남성으로서 한국 사회에서 학습된 가치들을 부정하는 과정이라 고민이 많고, 선생의 위치에서는 더욱 조심스러워요. 이 논의들이 너무 지치지 않는 시간 안에 발전적인 고민으로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점과 점을 선으로 연결하고, 그 선이 나타내는 궤적으로 무엇의 형상을 확인한다. 여러 시기에 방점을 찍고 일화로 그 점을 연결하며, 더듬더듬 궤적을 짚어나갈 수 있었다. 짧은 대화로 모든 점을 메울 수 없었을지라도, 앞으로의 일화가 그 갈라진 틈을 메워 새로운 궤적을 그릴 것이다. 12월, 윤한솔 연출가는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호신술›을 올린다. 그 또한 궤적에서, 틈을 채우는 하나의 의미 있는 점 혹은 이야기가 되기를.

글 신소원 | 사진 김경수 | 영상 김건희


세계의 문학, 자음과모음. 유수 문예지가 최근 몇 년간 대거 휴·폐간했다. 통폐합된 학과의 첫 번째 기수 출신인 나는 그런 일에 꽤 면역되어있는 편임에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학교 측의 일방적 통보에 항의하며 총장실을 점거하고 밤새도록 문학 이야기를 했다던 선배들의 모습은, 마치 실제로 본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진다. 나의 학부는 국어국문학과 문예창작학을 그대로 이어붙인 이름을 갖게 되었다. 선배들은 통폐합된 우리였더라도 이전과 같이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학년을 거듭하며, 우리가 단일 학과로 취급되기엔 너무 많은 학생과 너무 많은 과목을 감당해야 한다는 점이 드러나고야 말았다. 그때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노력해서 얻는 사랑은 종국에는 실패하고 만다는 사실을. 어쩌면 선배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질 것이 뻔한 싸움에서, 쉽게는 져주지 않으려 버티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끝내 통폐합되어버리는 무엇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마음을 헤아릴 때면, 그리고 지금의 나보다 어렸을 그들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나는, 

이상하게 외로웠다. 괜히 힘들었다. 심지어 슬펐다.


무자비한 Trendy와
이젠 바꿀 수 없는 Trace의 사이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은 ‘시대비평’이라는 인문 교양 잡지가 사실상 폐간과 다름없는 휴간을 맞기 전,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겨울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바냐를 이어받은 김남건 팀장에게 시대비평이 맞는 마지막 겨울은 여전히 ‘죽기 좋은 날씨’다. 새로 부임해 온 편집장과의 의견 충돌 전에도, 남건의 안에는 자신이 믿고 걸어온 길에 대한 회의가 조금씩 자라났다. 몇 해 전 인턴이었던 정샘이가 만난 똑똑하고 명쾌했던 남건의 눈은 이제 빛을 잃었다. 그럼에도 편집장이 부르짖는 트렌디는 무작정 휩쓸어버리는 파도 같아서, 다 휩쓸려갈 때 누군가는 굳건히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그저 그 자리를 꼭 붙들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한다. 편집장에게 삿대질하며 소리 지르는 김남건에게서, 끝까지 남아 일을 마무리하는 정샘이에게서, 새로운 기회와 미래를 꿈꾸는 박용우에게서, 무언가 짐작하고 고개를 돌려버린 강수혜에게서, 아무렴 괜찮다고 말하는 팽지인에게서, ‘살리고, 살리고’를 슬프게 말하는 조형래에게서, 지겹다고 혼잣말하는 서상원에게서. 나와 나의 선배들을 본다. 변해버린 시대 안에서 변하지 못한 사람들이 서성인다. 내게는 전부와 같은 세계가 누군가에게는 ‘시대’에 뒤처진 무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면 꽤 오래 서성여야 한다.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 ©두산아트센터

말의 무용함

그 이름마저도 대단한 과학-철학자 박용우는 말이 많다. 라플라스의 악마, 진화론, 꿈에 대한 이야기들이 극중에 산발적으로 펼쳐진다. 나와 당신의 상황에 대해, 우리가 처한 시대에 대해 끝없이 늘어놓는 말들은 이를 정확히 인식하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최종적인 판단을 유보하는 일이기도 하다. 트렌디를 대표하는 서상원 편집장의 말은, 아, 정말 무자비하다. ‘그래서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남건은 기가 차서 한숨을 쉬고, 답답해서 가슴을 친다. 아무리 말하더라도 이해받을 수 없는 감정이라는 사실만 증명되었기에. 남건과 용우가 덧붙이던 말들은 결국 시대비평이 이 ‘시대’를 따라갈 수 없다는 답을 최대한 미루고 싶어 꼬리를 물던, 그 답을 막기 위해 봇물처럼 터져나온 임시방편이었다. 극의 후반부까지 그러한 결론이 점차 극명해진다. 그래서일까, ‹컬쳐 브랜딩›과의 통폐합을 알리는 술자리에서 강수혜는 말이 시작되기도 전에 고개를 돌려버린다. 사실은 모두가 예감하고 있었던 말이 끝내 나온 그 시점에, 움직이는 것은 강수혜의 고개뿐이다.


당신은 정말로
‘아무거나’ ‘괜찮아?’ ‘상관없어?’

편집장의 젊은 애인이자 디자이너인 팽지인은 이상한 말버릇을 갖고 있다. 뭐가 먹고 싶으냐는 질문엔 ‘아무거나’, 일이 어떻냐는 질문엔 ‘괜찮아’, 힘들지 않으냐는 질문엔 ‘상관없어’. 끝도 없이 말을 쏟아내면서 진짜 비극을 유보하는 남건과 용우의 반대편에는 끝이 미처 찾아오기도 전에 이미 이를 예감하고 마음을 닫아버린 팽지인이 있다. 그러나 남건은 그녀를 ‘진짜’ 라고 평하며 박하사탕을 건네고, 용우는 그녀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렇잖아, 우리는 비슷하잖아.” 그들이 ‘진짜’인 지인과 새로운 미래를 그리기 위해 쓰는 방법은 ‘우리’에 편입시키는 것이다. 나와 네가 닮았다는 말은 이해와 공감인 동시에 다른 차원의 폭력이 되어 극 초반 외부인 같기만 하던 지인을 서성이게 만든다. 남건의 말은 폭력이었다가도, 용우의 입맞춤은 이해와 확인이 되기도 한다. 아무거나 괜찮고 상관없다는 지인은, 그 찰나의 입맞춤에서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아무렇든 괜찮지 않다는 것을, 상관 없지 않다는 사실을.


싸한 단맛의 박하사탕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은 가족도 일자리도 꿈도 잃어버린 남자가 생의 어떤 지점들을 돌아보며 그것이 혹시 ‘잘못 찍힌’ 점은 아니었는지 돌아보는 서사다. 영화의 명대사는 단연 남자가 기찻길에서 시뻘개진 눈으로 외치는 ‘나, 돌아갈래!’다. 남건도 그 남자와 닮았다. 남건은 요즘은 자꾸 나이 헛먹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같은 말을 읊조리며 술만 넘긴다. 다음 날 겉옷 주머니에는 술집에서 담아 왔을 박하사탕이 가득하다. 주머니에서 나온 박하사탕이 사무실 책상에 나뒹구는 모습이 퍽 애처롭다. 체호프는 ‹바냐 아저씨›를 희극이라 칭했다. 당대에 스타니슬랍스키가 연출한 후 이 작품은 나이 든 바냐의 비극으로 오래 인기를 끌었다. 지금의 관객 또한 그때와 다르지 않다. 남건의 투정, 샘이의 활기, 형래의 기타 연주에 웃으면서도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그들의 삶을 읽고 운다. 편집장이 통폐합 소식을 전할 때 남건은 이제는 내가 못해먹겠다고 선언하며 가슴에 품고 다니던 사표를 내던진다. 시대비평과 자신을 동일시하던 남건에게 시대비평의 끝은 자신의 종말과도 같은 무게를 지녔을 것이다. 하지만 겨우 사표다. 총을 들었던 바냐가 그 총으로 아무도 맞히지 못했던 것처럼, 사표 또한 꼬깃꼬깃 접힌 모양이었다. 그것을 보고 옅게 웃음이 났다. 그 사표에서 박하사탕의 싸한 단맛이 났다.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 ©두산아트센터

자, 일을 해야지

‘시대비평’과 ‘컬쳐브랜딩’은 나의 학과처럼 둘을 합친 이름도 되지 못할 것 같다. 시대를 꿰뚫어 보던 눈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법을 배우거나 ‘알아두면 쓸 데있는’ 같은 자조적인 수식어를 붙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 ‘시대비평’과는 대척점에 있는 듯 보이는 편집장까지 내뱉을 만큼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삶은 참 지겹다. 하지만 ‘시대비평’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남는다 해도 ‘시대’는 누구에게 부탁해야 하나? 사람은 괜찮아, 상관없어, 아무거나, 하며 만족하고 살 수 있다. 그것이 실패인지, 포기인지, 무덤덤한 승리인지 굳이 따지지 않고서도. 그러나 저 무거운 계간지 더미들은, 시대를 봤던 그 눈으로 이제 어디를 보아야 하지. 그런 마음이 무겁게 자리하는 가운데, 남건은,
일을 해야지.
하고 덧붙인다.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말이 그뿐인 상황에서 “우리는 그냥 해야지, 일을 하자.” 이렇게 말한다. 원작 발표 후 백 년이 더 흘렀지만, 그보다 나은 말이 없어 같은 끝을 맺었으리라. 우리는 엄청난 확률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나직한 용우의 읊조림과 함께.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고민하지 말고 우선은 이 길을 묵묵히 가자고. 우습게도 나 또한 그보다 합당한 제안을 할 능력이 없다. 아니, 이 지면에서는 그렇게 말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 같다.

비슷한 사람들아, 우리의 오늘이 비록 잘못 찍은 점처럼 느껴진다고 해도 아프지 맙시다. 대신에 우리, 자, 일을 합시다.

글 신소원
1 김광진의 곡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의 가사 일부다. 윤성호 작가의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과 동제로, 윤성호 작가 또한 이 곡에서 제목을 따 왔다고 밝혔다.
2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의 원안은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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