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어느 일요일의 일기.

 


오늘 성당에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자매님, 그러다 벌 받아요.
당장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받아요. 


 내용만 따지고 보면 편지랄 것도 없는 작은 쪽지였다. 하얀 편지지에 두 문장만이 적혀 있었다.
그 문장을 제외하고서는 너무나 공허한 여백이 있었다. 그 공백은 말하고자 한 것보다 더 많은
무언가를 설명해주는 듯 했다. 모래사장에 적힌 다잉 메시지처럼, 목울대에 걸려 터져 나온 마지
막 유언처럼 정제되어 순수하고 솔직한 말. 많은 것을 적으면 정작 중요한 말은 뒤로 숨는다. 사
라진다. 삼키게 된다.
 나는 그런 말이 그리웠다. 그래서 ‘벌 받아요’, 가 천박한 조언이 아니라 순수한 말이라고 느껴
졌다. 어쩌면 나는 평생토록 그런 것을 지나치게 그리워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 미친 광신도
여자가 왜 그런 편지를 전해 주었는지는 알고 있다. 그녀는 우리 아이를 진지하게 걱정하고 있다.
아이는 요즘 종이 접기에 빠져 있다. 미사를 보면서도 열심히 종이만 접는다. 그 여자는 그것을
걱정한다. 나는 아이가 열심히 접은 육식 공룡, 외계인의 얼굴과 같은 것을 하나하나 펴 본 적도
있었다. 이제는 멸종되었거나 인간의 상상 속에서나 존재했던 것들. 그 안에 무엇이 적혀 있을까
봐, 나 또한 두근거렸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애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애가 아니다. 끔찍할 때가 있다. 사람들
머리에서 상상해낼 수 있는 최악의 상 같은 것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떠올려보면. 그 애는 그
런 애가 아니다. 지독하게 핍진하지만 슬프도록 조촐한 경험이 만들어낸 상상. 그 속에 갇혀버린
아이는 악을 쓰고 절규한다. 아이가 접은 어떤 것에도 활자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죽어 없어
진, 있지도 않았던 생물들의 외양을 모방한 것이 전부였을 뿐이다.
 그러한 상상이야 말로 죄악일 것이다. 가장 뻔한 것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인간이기에, 그런
상상을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같은 신을 믿는 우리는 신이 두려워하라고 가르친 죄악을 더 당
당히 저지르며 산다.
 나는 아이가 무언가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다고, 믿고 있다. 믿고 싶다. 그래야만 한다. 언젠가
아이가 원하는 색의 종이가 없어서, 내가 주말 저녁 연 가게들을 샅샅이 뒤져 색종이를 찾을 때
였다. 나를 사랑하는 이는, 내가 나의 아이를 위해 하는 행동을 마음 아파하며, 아이에게 원망의
말을 울부짖었다. 너는 뭐가 도대체 그렇게 힘들다는 거니, 왜 그렇게 죽을 듯 악을 쓰고 우는 거
니. 그들이 그리하는 것도 이해한다. 나는 그렇게 답했다. 그것은 그 아이의 죄가 아니라 나의 죄
라고. 누구도 그것을 죄라 말하지 않아도, 나는 그것이 나의 죄임을 안다고.
 아이가 접은 종이 안에 내가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잃어버린 것이, 그리워하는 줄도 모르고 그
리워한 것들이 있다. 아이가 그것을 그만두면 나는 아이가 죽은 것처럼 울지도 모른다. 아이가 완
전히 종이접기에 질릴 때까지, 끝까지 해냈으면 좋겠다. 죽어 없어진 것들을, 정말 있다면 대부분
의 인간이 졸도해버릴 만큼 무서운 것들을 접는 일을.
 요즘은 쉽게 잠에 들지 못해 아침까지 죽어라 버티다가, 낮에 쪽잠을 잔다. 그럴 때면 항상 같
은 꿈을 꾼다. 언젠가 친한 언니가 말해준 일과 유사한 꿈이다. 도저히 아이들을 키워낼 자신이
없어 죽으려고 떠났다던 드라이브. 그녀는 기어코 행하려 했던 바를 해내지 못했다. 대신 뒷자리
에서 잠든 아이들을 부둥켜 안고 엉엉 울었다고 했다. 드라이브 대신, 꿈 안의 나는 아이를 업고
광활한 모래사장을 내달린다. 거칠고 뜨거운 모래가 발을 할퀼 즈음, 속옷 안까지 파고든 모래 때
문에 온몸이 미친듯이 가려울 즈음. 등에 업은 아이를 모래 사장 위에 살포시 내려놓는다. 아이는
눈을 뜨고 있다. 눈꺼풀 위에 수북이 쌓인 모래 때문에 시뻘개진 내 눈을 마주 보고 있다. 바라만
본다. 무슨 말이라도 할 것처럼, 더듬더듬 입을 움직인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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