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문학, 자음과모음. 유수 문예지가 최근 몇 년간 대거 휴·폐간했다. 통폐합된 학과의 첫 번째 기수 출신인 나는 그런 일에 꽤 면역되어있는 편임에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학교 측의 일방적 통보에 항의하며 총장실을 점거하고 밤새도록 문학 이야기를 했다던 선배들의 모습은, 마치 실제로 본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진다. 나의 학부는 국어국문학과 문예창작학을 그대로 이어붙인 이름을 갖게 되었다. 선배들은 통폐합된 우리였더라도 이전과 같이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학년을 거듭하며, 우리가 단일 학과로 취급되기엔 너무 많은 학생과 너무 많은 과목을 감당해야 한다는 점이 드러나고야 말았다. 그때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노력해서 얻는 사랑은 종국에는 실패하고 만다는 사실을. 어쩌면 선배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질 것이 뻔한 싸움에서, 쉽게는 져주지 않으려 버티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끝내 통폐합되어버리는 무엇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마음을 헤아릴 때면, 그리고 지금의 나보다 어렸을 그들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나는, 

이상하게 외로웠다. 괜히 힘들었다. 심지어 슬펐다.


무자비한 Trendy와
이젠 바꿀 수 없는 Trace의 사이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은 ‘시대비평’이라는 인문 교양 잡지가 사실상 폐간과 다름없는 휴간을 맞기 전,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겨울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바냐를 이어받은 김남건 팀장에게 시대비평이 맞는 마지막 겨울은 여전히 ‘죽기 좋은 날씨’다. 새로 부임해 온 편집장과의 의견 충돌 전에도, 남건의 안에는 자신이 믿고 걸어온 길에 대한 회의가 조금씩 자라났다. 몇 해 전 인턴이었던 정샘이가 만난 똑똑하고 명쾌했던 남건의 눈은 이제 빛을 잃었다. 그럼에도 편집장이 부르짖는 트렌디는 무작정 휩쓸어버리는 파도 같아서, 다 휩쓸려갈 때 누군가는 굳건히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그저 그 자리를 꼭 붙들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한다. 편집장에게 삿대질하며 소리 지르는 김남건에게서, 끝까지 남아 일을 마무리하는 정샘이에게서, 새로운 기회와 미래를 꿈꾸는 박용우에게서, 무언가 짐작하고 고개를 돌려버린 강수혜에게서, 아무렴 괜찮다고 말하는 팽지인에게서, ‘살리고, 살리고’를 슬프게 말하는 조형래에게서, 지겹다고 혼잣말하는 서상원에게서. 나와 나의 선배들을 본다. 변해버린 시대 안에서 변하지 못한 사람들이 서성인다. 내게는 전부와 같은 세계가 누군가에게는 ‘시대’에 뒤처진 무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면 꽤 오래 서성여야 한다.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 ©두산아트센터

말의 무용함

그 이름마저도 대단한 과학-철학자 박용우는 말이 많다. 라플라스의 악마, 진화론, 꿈에 대한 이야기들이 극중에 산발적으로 펼쳐진다. 나와 당신의 상황에 대해, 우리가 처한 시대에 대해 끝없이 늘어놓는 말들은 이를 정확히 인식하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최종적인 판단을 유보하는 일이기도 하다. 트렌디를 대표하는 서상원 편집장의 말은, 아, 정말 무자비하다. ‘그래서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남건은 기가 차서 한숨을 쉬고, 답답해서 가슴을 친다. 아무리 말하더라도 이해받을 수 없는 감정이라는 사실만 증명되었기에. 남건과 용우가 덧붙이던 말들은 결국 시대비평이 이 ‘시대’를 따라갈 수 없다는 답을 최대한 미루고 싶어 꼬리를 물던, 그 답을 막기 위해 봇물처럼 터져나온 임시방편이었다. 극의 후반부까지 그러한 결론이 점차 극명해진다. 그래서일까, ‹컬쳐 브랜딩›과의 통폐합을 알리는 술자리에서 강수혜는 말이 시작되기도 전에 고개를 돌려버린다. 사실은 모두가 예감하고 있었던 말이 끝내 나온 그 시점에, 움직이는 것은 강수혜의 고개뿐이다.


당신은 정말로
‘아무거나’ ‘괜찮아?’ ‘상관없어?’

편집장의 젊은 애인이자 디자이너인 팽지인은 이상한 말버릇을 갖고 있다. 뭐가 먹고 싶으냐는 질문엔 ‘아무거나’, 일이 어떻냐는 질문엔 ‘괜찮아’, 힘들지 않으냐는 질문엔 ‘상관없어’. 끝도 없이 말을 쏟아내면서 진짜 비극을 유보하는 남건과 용우의 반대편에는 끝이 미처 찾아오기도 전에 이미 이를 예감하고 마음을 닫아버린 팽지인이 있다. 그러나 남건은 그녀를 ‘진짜’ 라고 평하며 박하사탕을 건네고, 용우는 그녀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렇잖아, 우리는 비슷하잖아.” 그들이 ‘진짜’인 지인과 새로운 미래를 그리기 위해 쓰는 방법은 ‘우리’에 편입시키는 것이다. 나와 네가 닮았다는 말은 이해와 공감인 동시에 다른 차원의 폭력이 되어 극 초반 외부인 같기만 하던 지인을 서성이게 만든다. 남건의 말은 폭력이었다가도, 용우의 입맞춤은 이해와 확인이 되기도 한다. 아무거나 괜찮고 상관없다는 지인은, 그 찰나의 입맞춤에서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아무렇든 괜찮지 않다는 것을, 상관 없지 않다는 사실을.


싸한 단맛의 박하사탕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은 가족도 일자리도 꿈도 잃어버린 남자가 생의 어떤 지점들을 돌아보며 그것이 혹시 ‘잘못 찍힌’ 점은 아니었는지 돌아보는 서사다. 영화의 명대사는 단연 남자가 기찻길에서 시뻘개진 눈으로 외치는 ‘나, 돌아갈래!’다. 남건도 그 남자와 닮았다. 남건은 요즘은 자꾸 나이 헛먹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같은 말을 읊조리며 술만 넘긴다. 다음 날 겉옷 주머니에는 술집에서 담아 왔을 박하사탕이 가득하다. 주머니에서 나온 박하사탕이 사무실 책상에 나뒹구는 모습이 퍽 애처롭다. 체호프는 ‹바냐 아저씨›를 희극이라 칭했다. 당대에 스타니슬랍스키가 연출한 후 이 작품은 나이 든 바냐의 비극으로 오래 인기를 끌었다. 지금의 관객 또한 그때와 다르지 않다. 남건의 투정, 샘이의 활기, 형래의 기타 연주에 웃으면서도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그들의 삶을 읽고 운다. 편집장이 통폐합 소식을 전할 때 남건은 이제는 내가 못해먹겠다고 선언하며 가슴에 품고 다니던 사표를 내던진다. 시대비평과 자신을 동일시하던 남건에게 시대비평의 끝은 자신의 종말과도 같은 무게를 지녔을 것이다. 하지만 겨우 사표다. 총을 들었던 바냐가 그 총으로 아무도 맞히지 못했던 것처럼, 사표 또한 꼬깃꼬깃 접힌 모양이었다. 그것을 보고 옅게 웃음이 났다. 그 사표에서 박하사탕의 싸한 단맛이 났다.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 ©두산아트센터

자, 일을 해야지

‘시대비평’과 ‘컬쳐브랜딩’은 나의 학과처럼 둘을 합친 이름도 되지 못할 것 같다. 시대를 꿰뚫어 보던 눈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법을 배우거나 ‘알아두면 쓸 데있는’ 같은 자조적인 수식어를 붙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 ‘시대비평’과는 대척점에 있는 듯 보이는 편집장까지 내뱉을 만큼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삶은 참 지겹다. 하지만 ‘시대비평’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남는다 해도 ‘시대’는 누구에게 부탁해야 하나? 사람은 괜찮아, 상관없어, 아무거나, 하며 만족하고 살 수 있다. 그것이 실패인지, 포기인지, 무덤덤한 승리인지 굳이 따지지 않고서도. 그러나 저 무거운 계간지 더미들은, 시대를 봤던 그 눈으로 이제 어디를 보아야 하지. 그런 마음이 무겁게 자리하는 가운데, 남건은,
일을 해야지.
하고 덧붙인다.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말이 그뿐인 상황에서 “우리는 그냥 해야지, 일을 하자.” 이렇게 말한다. 원작 발표 후 백 년이 더 흘렀지만, 그보다 나은 말이 없어 같은 끝을 맺었으리라. 우리는 엄청난 확률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나직한 용우의 읊조림과 함께.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고민하지 말고 우선은 이 길을 묵묵히 가자고. 우습게도 나 또한 그보다 합당한 제안을 할 능력이 없다. 아니, 이 지면에서는 그렇게 말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 같다.

비슷한 사람들아, 우리의 오늘이 비록 잘못 찍은 점처럼 느껴진다고 해도 아프지 맙시다. 대신에 우리, 자, 일을 합시다.

글 신소원
1 김광진의 곡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의 가사 일부다. 윤성호 작가의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과 동제로, 윤성호 작가 또한 이 곡에서 제목을 따 왔다고 밝혔다.
2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의 원안은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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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자유/ 김재엽/ 두산아트센터  (0) 2017.09.22

 

 

 

 

 

나 또한 내가 파리에서 보낸 시간들을 대책없이 미화하고, 가끔은 진한 향수에 시달릴 때가 있으나, 오늘 나보다 더한 사람을 만났다. 두산아트센터에서 오늘 막을 올린 생각은 자유>를 통해서였다.

 

 

작/연출을 맡은 김재엽 씨의 1년간의 베를린 체류기는 말그대로 엉성한 콜라주의 밭이다. 자신의 극에서 연극의 책임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우습게도 극 내에는 그다지 책임감 없이 던지는 이미지들이 난무한다. 세월호, 1113 파리테러, 위안부 나눔의 집 이야기까지. 바깥에서만 보이는 안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희망이 다소 과했다. 또한 안의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바깥의 문제를 감상적으로 다루는 것, 영감으로서 활용(사실 이용이라고 말하고 싶다)하는 것이 용인될 수 있는 문제인가도 의문이다.

 

 

이런 문제들이 극에 대두될 때, 배우이면서 인간 자신이기도 한 예술가는 필연적으로 한없이 진지한 태도를 갖게 된다. 결의 넘치는 표정을 배우가 짓도록 만드는 예술가의 책임은 보다 막중하다. 내가 보았다고, 그래서 하고싶다고 막 올려서는 안 된다. 당연하게도. 또한 장장 130분의 러닝타임에서 배우들이 대사를 주고 받을 때, 몇 차례 어색한 침묵이 있었다. 그것은 초연이기 때문일 수도, 혹은 대본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본인은 후자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애초에 이 극이 구사하는 언어가 연극의 언어가 아니며, 어떠한 인물도 그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극이 오늘 보여준 침묵은 작가 자신의 독백, 혼잣말, 일기의 문장, 그 낱낱의 문장들 간에 메우지 못한 틈새다. 한 인물과 다른 인물의 말은 갈등도 긴장도 이루지 못한다. 영원히 충돌하고 항상 화해하는 자기 자신의 생각이므로. 배우들의 대사가 꼬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배우들이 말을 씹는 횟수를 심지어 세아려 보았는데, 정확히 바를 정자가 두 번이나 완성되고 삼 획을 더 그었다. 한 인물의 말버릇이 아니라, 극 전반 배우들이 고루 그러했다. 침묵, 말더듬기. 이것이 인물의 성격 형성에 도움을 주기는 커녕, 그냥 이 연극 자체의 성격이 침묵과 말더듬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관객은 창작자의 기대보다 훨씬 더 똑똑하다. 그리고 그들은 세계시민 난민 이주민-소위 디아스포라에 대해 알고 싶은 내용이 있었다면, 차라리 책을 읽을 것이다. 어떤 이야기는 그것이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 가능한 형식을 스스로 찾아간다.

 

 

오늘 극장에서 벌어진 일은 이것이 연극이 될 수 없음을 증명했다. 교수님은 독일 체류기에 관한 강연 혹은 극작스플레인을 하셔도 될텐데 구태여 연극을 올리셨을까. 사람이 꼭 하던 것으로 보여주어야 하는가, 뭐 생각은 자유라면 할말 없다. 연극이나 똑바로 해야할 텐데. 아 정말, 그러게나 말이다. 극에서 파독 간호사와 재독 간호사 간의 차이, 적확한 언어 사용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는 대목이 있다. 나는 나라가 보낸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해서 왔소. 그래서 파독이 아니라 재독이오. 손님이 아니라, 주인으로서 여기 살아있고 싶어요. 1년이라는 체류 기간의 한계일까, 혹은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는 스타일인걸까. 다 모아서 태우고 그 잔해에서 시작해도 모자랄 텐데 이것들을 모아다 꼴라쥬를 시도하다니. 그 따뜻한 마음은 어떻게 이해해보겠으나, 오늘의 극은 아무리 생각해도 파독형 극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심지어 제 발 지린 대사도 있었다. 대본은 안 쓰고, 자기에 대한 성찰을 한 거네? 유감스럽다. 프로라기엔 상당히 치사한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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