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네가 말하는 소설이라는 건, 진짜 소설 같은 거네?”

 

그런 말을 하며, H는 길게 풀어헤친 머리를 왼쪽으로 넘겨 빗었다.

 

그 뭐냐, <오발탄>, <김 첨지>, 그런 거.”

 

나는 입을 움직이다, 이것이 성급하고 충분치 않은 답이라는 생각에 곧장 다물었다. 대신 한 몇 초간 포크를 만지작거리다 그래, 그런 셈이지, 하고 그 순간을 넘겼다. 그런 내 모습이 아주 불성실하다는 생각도 잠깐 스쳤다.

<오발탄>, <김 첨지> 같은 것.

고등학교 졸업 이후 오랜만에 들어본 이야기였다. 한 번쯤 학과 선후배들이나 동기들과의 술자리에서 우스갯소리로 나오지 않았다면, 아마 처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술자리에서 보낸 시간들을 그리운 것들로 회상하기에 아직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촉발된 이 이상한 향수와 H에 대한 환멸 같은 것은 미뤄두었다.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 다시 그 사람들을 만난다면, 그때 이 상황을 말해줘야지, 꼭 잊지 말고 기억해서 한 재미 봐야지 다짐했다.

H와의 약속은 내게 늘 예정된 실패, 실패의 연속 같은 것이었다. 나는 길거리를 걷다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 그녀와 약속을 잡고, 그날 잠자리에 누워서는 대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자책했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면 미룰 수 있을 때까지 침대에 엎드려 있다가, 돌연 벌떡 일어나 문을 나섰다. 그러니까, 나는 H를 만날 때마다 이상한 모순에 시달렸다. 그녀와 함께 이야기를 할 때면 도무지 말이 안 통한다고 느꼈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이야기를 뱉을 수 있었고,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각오를 해놓고서는 매번 흥미로운 장면을 낚아채곤 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같은 학교의 유학생인 우리의 행정적인 일을 봐주는 교직원에 대한 주제가 등장한다. 자기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고려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입 밖에 꺼내지 않을 말을, H는 서슴없이 뱉었다.

 

그 여자, 어딘가 좀 재수없어.”

 

, 냐고 물으면,

나한테는 틱틱 거리다가, 남자하고는 웃으면서 얘기하잖아. 그리고,”

 

그리고? 하고 받아치면,

학교 직원이 옷을 너무 야하게 입어. 입술도 시뻘겋게 칠해선. 가슴도 막 터질 것 같애.”

 

H의 이야기가 그 정도까지 진척이 되면,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 몇몇은 몰래 눈길을 주고받았다. 우리중 누구도 H의 그런 말들에 대해 따로 코멘트를 붙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H가 입을 뗄 때면 나머지 사람들의 관계는 어딘가 가까워지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나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은, H가 답하는 데 별 무리 없을 법한 질문들만 던졌다. 그러다보니 다 같이 모이는 자리에서 대개 질문은 그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질문을 하면, 그녀의 답보다 그의 질문 자체가 더 화제가 되었다. 간혹 그녀에게 현재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이는 배려심 없고 난 체하길 좋아하는 인간으로 낙인찍혔다. H가 다른 무엇보다 자신 있어하는 다이어트나 운동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라면, 부드럽고 상대방에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라는 좋은 인상을 획득할 수 있었다.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을 알아갈 수 있다니, 이건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흥미로운 관계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상냥한 편이었다. 그리고 다른 말로는 H에게 아무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는 부류라고 할 수 있다. 나는 H와 대화를 할 때, 우리가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한 발 진보할 겨를도, 뒤로 퇴보할 일도 없는 단조로운 이야기를 찾아냈다. 높낮이가 없고 정체된 순간 하나만을 적시하는, 그런 이야기들에 머무르며 시간을 밟아나갔다. 그런 것들은 서두르지도 질질 끌지도 않으면서, 아주 일정한 속도로 초침을 진척시키는 데에 효력이 있었다. 어떤 답이 돌아올지 뻔한 질문을 던지는 일. 항시 번뜩이는 순간들만을 기다리던 내게 그 행위는 묘한 쾌감을 안겨 주었다. 단 한 번도 내가 그런 것을 잘해낼 것이라 기대해보지 않았던 터였다. 언젠가 일상의 단란함 같은 것만을 즐기며 긴 생을 살아가야 한다면, H와 같은 사람은 그런 생에 꼭 필요하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먼 타지에서 H 같은 사람과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면 기염을 토할 얼굴이 몇몇 있었다. 네가? ? 같은 어구들을 힘껏 던지면서 말이다. 그에 대한 나의 답은 다음과 같다. 그러게, 내가, , 여기까지 와서. 아무렴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말이다. 한국에서도 만나보지 못한 어떤 당황스러울 정도의 멍청함과 무지몽매의 집합체 같은 것을 여기에서 가까이할 것이라고는 나도 예상치 못했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 한국에서 악착같이 자잘한 것들을 버려왔던 것은 결국 여기에서 진짜배기 하나를 얻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같은. H는 어느새 그런 존재가 되었다.

 

어찌됐든 벌인 일에 책임을 지는 것이 어른이고, 누군가 정해놓은 기준에 따르면 나도 어엿한 성인이므로 H의 질문에도 답을 해야 했다. 이 주제가 한국에 두고 온 친구들 사이에 던져진 것이라면 이야기는 아마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오발탄>, <김 첨지>라는 말이 맥락상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만 기억하는 사람들과 함께였다면, 우리는 한바탕 실컷 웃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H의 물음에 나는 내가 기억하는 오발탄과 김 첨지가 무엇인지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다른 이들과의 대화에서는 <오발탄><김 첨지>가 발화되는 순간의 분위기를 쉽게 짐작했는데, H와의 것에서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말하는 <오발탄><김 첨지>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그것이 내가 알던 만큼의 웃음기와 진지함을 담고 있기는 한지 가늠조차 하지 못했다. 거기에는 어쩌면, 그녀가 나보다 훨씬 더 <오발탄><김 첨지>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속속들이, 정말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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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Picasso voyage a Paris pour la premiere fois et s’y installe en onctobre en meme temps que son ami, l’artiste Cosagemas, don't le suicide marque le debut de la periode blueue..

 

 

*한 벽면에 비슷해보이는 세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 중 하나에는 ‘2,1,55’ 일자의 사인이 그려져 있었다. 피카소는 12일 같은 날에, 모두들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그런 날에 이전부터 그려온 그림을 완성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같은 소를 다른 모양으로 바꾸는 세 편의 연작을 의도했을까. 그림은 6일과 10일 간격으로 하나씩 완성되었다. 선밖에 남지 않은 황소에게도 같은 양의 그림자를 그려준 것이 눈에 띄었다. 1900년에 죽었다는 그의 친구 이야기를 접하고 나자, 저 소나 소의 그림자 모두 그의 친구처럼 보였다. 그가 붓터치 어디에나 그의 친구가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그가 별달리 신경 쓰지 않고서 만든 가이드라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그 전부터 윤곽이 강조된 그림을 그려왔으니까. 어쩌면 후대에 이 그림을 보고 있을 나 같은 사람을 두고 장난을 쳐놓은 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이미지를 기대하는지 확실히 알고 난 이후에 생산하는 것들. 나는 50, 60년에 피카소가 그린 것들을 본다. 그런데 거기에는 윌리엄 터너나 르누아르, 모네에게서 보이던 어떤 독특한 종류의 인상은 없다. 그림의 여자들은 르누아르처럼 지루해하지도, 모네의 수련처럼 모든 색을 먹어버리지도, 터너의 흐린 하늘처럼 거장의 색채처럼 보이게 해줄유리가 씌었다는 인상도 없다.

 

 

***나는 43년 이후 시 같은 것은 쓴 적이 없어.’

1895. L'homme à la casquette

그 유명한 천재의 어린 시절, 열다섯에 그렸다는 유화였다. 그림은 상대적으로 작았고 색채 또한 어두웠다. 바로 옆에는 <Maternite>라는 71년에 완성한 그림이 있었다. 컸고, 초록과 잿빛으로 가득했다. 80년의 시간이 30cm의 간격을 두고 걸렸다. 나는 피카소가 어릴 적 배운 대로, 그러니까 1890년대의 붓질로 그리고 싶은, 그릴 수 있는 사람이 이후 그에게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스물 한 살 여름, 1901년 여름, 그는 친구 Casagemas의 죽음 이후 진녹빛 수도관 같은 색으로 그의 얼굴을 그렸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흔들렸다. 피카소의 ‘Bleue’period라고 일컬어지는 시기 역시, 다른 어떤 화풍 보다도 어쩌면 그가 아주 많이 흔들렸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피카소는 1905년부터 여자를 그릴 때 돼지에게서나 찾아볼 법한 분홍색을 썼다. 나는 그것이 여자를 화나게 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피카소를 떠났다. 아무리 대단한 예술가의 뮤즈가 된다고 해도, 돼지를 그릴 때나 쓰는 분홍색으로 아내를 바라보는 것을 참을 여자는 세상에 없기 때문에.

1905, 그날 이후로 그는 더이상 예전 같은 그림은 그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 여자가 마지막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정말로 그림다운 그림만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성공하기 위해서, 유명해지기 위해서,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 그때쯤 친구는 죽고 여자도 떠나 주었다. 마침 그런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었을까. 딱 한 번 예외가 있었다면 1918년에 그린 Olga의 초상화였다. 그녀는 성공을 위해 쓰이기엔 너무도 예쁘고 사랑스러웠으며, 필요 이상으로 친밀한 여자였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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