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파트너› 의 장면

연습이 한창이던 어느 금요일, 한 시에 시작하는 연습에 앞서 열두 시쯤 세정(전문사 연기과 15)과 먼저 만나서 작품에 대해 얘기하기로 했다. 그와 나는 2018년 여름 ‘돌곶이 인큐베이터 워크숍’에서 작가와 배우로 만났다. 지난 여름에 이어 다시 인큐베이터 워크숍에 참여했다는 그가, 어떤 작품으로 이 겨울을 보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전날 그가 보내온 ‹파트너›의 대본을 읽었다. 1월 25일, 연습 3주차 즈음이라는 그 날까지 정리된 것만도 50장에 가까운 적지 않은 분량이었다. 총 6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이야기, 이 6이라는 숫자는 ‹파트너›의 무대에 오르는 배우의 숫자 여섯 명과도 일치했다. 처음 만났지만, 어딘가 익숙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들. 대본에 쓰인 여섯 개의 배우 이름에는 아는 이도, 전혀 모르는 이도 있었다. 이름의 주인들이 어떻게 이 이야기를 그려낼지 헤아리는 동안, 나는 짧게 웃기도 하고 울컥하는 마음을 다스리려 목을 가다듬기도 했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자연스레 각 에피소드마다 등장하는 ‘파트너’라는 배역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여섯 개의 이야기들은 그들이 다루는 소재와 내용이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다가 파트너라는 배역이 등장함과 동시에 하나로 묶이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런 고민이 이어지고 있을 때 쯤, 지난 여름 공연에서 파트너였던 세정이 카페로 들어왔다. 

돌곶이 인큐베이터 워크숍
여름과 겨울 방학마다 연극원 학생들이 통칭 ‘인큐’, ‘야합’이라고 부르는 공연이 올라간다. 두 프로그램 모두 연극원 학생들이 학과 수업에서 벗어나 직접 창작하고 다양한 실험을 통해 공연을 준비한다. 소정의 제작비와 무대를 지원받고 발전 가능성이 있는 작품이라면 후속 지원을 받는 혜택이 있지만 대본부터 시작해 스탭 구인, 무대, 소품까지 모든 것을 학생들 스스로 해내야 하기에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나의 경우에만도, 1학기 종강 후 한 달 반은 인큐 준비와 함께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 여름이 지독하게 더웠는지도 제대로 기억이 안 날만큼 바쁜 한 달이었다.

세정은 연극원 재학 중 총 세 번의 인큐 공연에 참여했다. 그런 그가 생각하는 인큐의 첫 번째 장점은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인큐 선정작은 대부분 순수 창작물이거나 기존의 작품을 재구성한 것이다. 초연의 일원으로서 작품 개발에 참여하며, 작품을 만드는 새로운 방식을 배운다. 그것은 오랜 기간 작업을 해온 세정에게도 늘 흥미로운 일이다. 공연을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곧, 새로운 배움이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서 나 역시 연극원에서 배운 바이기에 크게 공감했다. 

힘든 점이라면 응당 적은 제작비이지만, 인큐 자체가 작품 개발과 발굴에 성격을 두고 있으니 공연보다는 개발 전 단계라 여기면 그 또한 납득할 만하다. 그럼에도 60만원이라는 제작비에 맞추기 위해 공연을 빈 무대에서 올릴 수는 없으니, 무대나 소품에 있어서는 기술적인 지원이 주어지면 한결 나을 것이다. 이전 학기 공연의 소품들을 재활용할 수 있도록 목록화되어 있다면 혹은 제작사의 구 세트들을 지원받아 이를 바탕으로 준비하는 공연이라면 어떨까? 무언가를 구체화하고 키워낸다는 ‘incubate’, 기술과 아이디어를 실험해보는 장인 ‘workshop’의 이름을 따르는 데에는 조금 더 보완되어야 하는 지점이 필요하다. 계속해서 유지될 프로그램이라면 짧은 준비기간 작업 진행이 더뎌지지 않도록 이를 도와주는 기술적인 풀이 갖춰져야 한다는 데에는 아마 모든 연극원 학생들이 동의할 것이다. 


협업자, 동기, 친구, 파트너…
전문사 연기과 15학번 네 명, 전문사 연기과 17학번 한 명, 예술사 연기과 09학번 한 명 으로 이뤄진 ‹파트너›의 배우진들. 오십여 장의 대본이 무색하게, 세정이 처음 꺼낸 말은 처음부터 ‹파트너›를 공동창작으로 진행할 생각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함께 연극원 과정을 수료한 동기이자 오랜 친구들이 마지막 방학에 무얼 하든지 함께 해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 시작이었다. 

세정이 섭외한 극단 작은 방의 신재윤 연출은, 그들에게 공동창작을 제안했다. 문제는 ‘무엇’을 창작할 것이냐는 지점이었다. 커피숍에 앉아 한창 고민이 이어지던 중 던져진 화두는 ‘관계’였다. 그렇게 ‘파트너’라는 이름이 그들의 화두로 던져졌다. 

그들은 파트너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가 삶 속에서 만나는 모든 관계를 이야기해보고자 했다. 그렇게 각자에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지만 중요한 관계, 항상 생각하지만 해결하지 못하는 파트너들을 떠올렸다. 그렇게 준비해온 자신만의 에피소드들이 이야기로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극 중에 등장하는 ‘파트너’라는 배역은 탈을 쓰고 등장한다. 원래는 ‘바야바’와 같은 다소 의미심장한 이름이 있었지만 이내 그 의미를 배우들이 관객의 손에 직접 쥐어주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해 그 이름을 버렸다. 그저 ‘파트너’라는 이름으로, 개개인의 삶에 꼭 하나씩은 존재하는 이들로 다가가기를. 관객에게도 그 탈 너머에 있는 자신만의 파트너가 보이기를 원했다. 

오히려 작업 초반에는 ‘파트너’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정리되었던 것 같은데, 진행되면서 점점 명확히 해석하기 어려워졌다. 이는 ‹파트너›의 이야기가 더 풍성해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바깥으로 끌어내주는
또는 나에게 이야기를 심어준 이들

작업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극작의 기본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일단 ‘써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세정은 기본적인 극작에 대해 한계와 갈증을 느꼈다고 했다. 가장 솔직한 말을 하자니 무대 위에서 너무 유치하게 느껴질까봐 부끄러웠고, 계속해서 바꾸어도 충분히 정제되지 않고 터져나간 말들이 눈에 밟혔다. 세정은 ‹아버지의 기억 훈련›이라는 대본을 썼는데, 이는 그가 가장 하기 싫은 자신의 이야기였다. 

세정의 안에는 아버지가 심어준 관계성에 대한 화두가 있었다. 자기 얘기를 하자니 자의식이 개입하고, 무대 위에서 청승을 떠는 것처럼 보일까봐 도저히 못하겠다고 여러 번 말했다. 

내 이야기를 하니 자꾸 과거로 돌아가는 것 또한 괴로운 일이었다. 그런 세정에게, 신재윤 연출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세정은 해냈다. 이를 해내기까지 3주동안 그들은 줄기차게 ‘대화’를 했다. 이는 세정 외의 다른 다섯 명의 배우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직 과거에서부터 무대로 이야기를 완전히 빼오지 못한 친구들을 위해, 세정 또한 그들과의 대화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어떤 이야기를 쓸 것인가, 어떻게 쓸 것인가. 서로에게 느끼는 편안함 덕분에 이를 진심으로 들어주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에, 이야기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태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세정에게는 파트너가 어떤 의미일까? 그는 ‘내 것을 나눠주는 일’이라 답했다. 이런 답을 알려준 것은 삶에서 깊은 관계를 맺었던 경험들이었다. 물질적인 것을, 혹은 마음을 준다거나, 홀로 그 사람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거나 하는 일들. 온전한 나의 것이라 치부되던 나의 몸과 나의 시간을 할애해 상대방에게 쏟는 일. 그런 일을 하고 나면 세정은 그의, 그리고 그 역시 세정의 ‘파트너’가 되었다. 


무대 위에서, 
기꺼이 서로의 파트너가 된다는 것

연극 작업 안에서 ‘파트너’라는 개념은 어떨까? 세정은 작업하는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일은 결국 ‘피치 못한 희생’이라고 여태 생각해왔다. 공연을 올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나의 노력과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맞지 않는 사람이어도 맞춰가야 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작업이 흘러가더라도 여전히 마음을 쏟아야 한다. 작업에 참여하는 그 누구도 자기가 원하는 100퍼센트를 실현할 수 없다. 결국 개개인이 조금씩 희생한 것들이 모여 하나의 공연을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한편 요즘 들어서는 ‘희생’이라는 단어가 목 언저리에 한 번씩은 걸린다. 우리가 꼭 ‘희생’을 해야만 하는 걸까? 지금 이 단어를 꺼내며 나 또는 내 옆 사람의 감정이 불가피하게 희생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절대 맞지 않을 것 같은 사람과 마음을 맞춰보려는 노력, 서로의 욕심을 조금씩만 내려놓고 조율해가는 일이 대단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러한 희생이 수평적 관계 안에서 일어날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인 것 아닐까, 하는 나의 말에 세정은 잠시 생각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작품을 할 때면 항상 느끼는 바가 있다고 했다. 연극이, 공연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실제 삶 또한 이 정도로 살아내지 못했을 것 같다고. 작품이 잘되지 않으면 계속해서 곱씹고 반성할 수 있었고, 작품이 잘 되면 기분이 좋아지고 자신감이 차올랐다가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맨땅에 헤딩’식으로 시작했는데, 우려한 것보다 굉장히 잘 나온 것 같고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배운다’는 것이 연극을 계속하게 만드는 이유일까. 

‘잘 될 거예요, 여름에도 어쨌든 공연은 잘 올라갔잖아요.’ 하는 나의 말에 그는 웃으며 핀잔을 준다. ‘에이, 여름 인큐는 아무 생각 없이 하니까 좋았지.’ 여름에도 우리는 똑같이 ‘맨땅에 헤딩’이었던 것 같은데. 금세 잊고 웃는 세정을 보며 그는 다른 이에게 참 좋은 파트너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트너’가 된다는 것이 그의 말처럼 ‘피치 못한 희생’을 담보로 한다면, 좋은 파트너가 되기 위해 한 계절쯤은 기꺼이 희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글 신소원

ⓒ싸우나스튜디오 김경수

한해를 자평하기에는 아직 이른 11월의 오후, 연출가 윤한솔 교수를 만났다. 무언가의 끝 앞에 설 때면, 시간의 구분이 인간의 자의적 단위이며 어차피 우리는 항상 연속되는 시간 위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그 때문에 자평 혹은 마무리가 부질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윤한솔 교수의 2018년처럼, 지금도 새로운 도전과 작업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면 더욱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생각 또한 인간의 자의적 판단이라 투정해보며, 매겨지는 숫자를 잠시 멈춘 채 유의미한 방점들을 함께 짚어보았다. 궤적을 발견하기 위해.

2018년의 시작-연극원 교수로서, 예술감독으로서
연극원에 오는 것이 계획에 없던 일이어서, 2018년에 잡혀있던 일정과 맞물려 본의 아니게 굉장히 바빴어요.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는 그동안 연출들이 하지 못한 형식적, 미학적 실험을 기획했어요. 국립극단 선언문의 내용과 형식 안에서 연극과 극장의 공공성·동시대성을 논하고 각자의 작업이 이에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지점에서 만나는지 네 편의 쇼케이스를 진행했죠. 연극원 교수는 독립된 전공으로 학생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연출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가르치고 싶은 욕망이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자리같아요. 운 좋게 오게 돼 더할 나위 없이 좋고요. 바쁜 동시에 조용히 지나간 한 해였다는 느낌도 들어서, 올해가 지나가야 자평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술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
단답형으로 답한다면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예술교육이 실행을 위한 기술과 영감의 영역으로 크게 나뉜다고 보면, 전자는 기술 숙련을 목표로 가르칠 수 있어요. 하지만 후자는 학습에 의해 가능한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전자를 제대로 가르치는 것, 그리고 영감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예술교육의 한계이자 해야 할 일이겠죠. 저는 예술이 경험을 확장해서 새로운 소통양식을 구현하는 독특한 사회활동이라 생각해요. 개인이 개인에게, 또는 집단이 집단에 한결 근사하게 보이거나 경이로운 경험을 하게 하는. 그래서 예술교육 또한 한 명의 예술가를 양성하는 것과 함께 조금 더 아름답고 즐겁게 살 수 있는 소양을 가르치는 문제 같기도 해요. 개인적으로는 ‘나는 가르치고 너는 배운다’는 전통적인 프레임을 벗어나서, 연극 교육 안에서의 관계 자체를 다르게 정립하고 싶어요. 그 대안을 학생들과 함께 모의해야 하는 시절이라고 생각해요.


‹1984› ©두산아트센터

도전, 그리고 상상할 수 없던 변화
대학원을 연극영화과로 진학한 후에는 부족하고 엉성했던 연극반에서의 공연과는 달리 좀 멀쩡한 프로덕션을 경험해보고 싶어서 뮤지컬 제작사에 찾아갔어요. 연출부로 몇 년 일하니 프로덕션 경험은 쌓이는데 여전히 연출은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고, 이게 정말 내가 하고픈 일인지 의문이 들었어요. 환경을 바꿔보고 싶고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에 뉴욕으로 유학을 갔죠. 학교 2년에 극단 생활 3년을 합쳐 5년간 있었는데 2000년에 9·11 테러가 일어났죠. 집에서 조금만 걸어 나가면 분진이 날려오는 거리에 살다 보니, 책과 영상으로 숱하게 접한 것임에도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 생겼어요. ‘얼마나 미우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내가 죽으면서,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지?’ 그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물어서 당시 2~3년간은 짧은 시간 가장 많은 책을 읽으며 공부했죠. 말 그대로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노트에 ‘얼마나 미우면’을 수도 없이 적었어요.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얼마나 미우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저 자신이 인간의 본성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줄 알았는데, 아무리 미워도 그럴 수 없다는 아주 옅은 바람이 생긴 후 분노와 미움은 중요한 화두가 되었어요. 잘나가는 유명한 연출가가 되고 싶었던 바람이 사라지고 연극하는 이유가 달라졌죠. 그건 제게 상상할 수 없던 변화였어요.

연극을 한다는 것
어떤 예술 장르든 각자 고유한 속성이, 그 장르가 구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만드는 연극을 필요로 하는 이가 분명히 있다고 믿어요, 막연한 믿음이지만. 직업은 일정한 일을 하고 일정한 보수를 받아 삶을 영위하는 것인데, 연극은 그게 쉽지 않으니 독특한 사회활동이라 말하고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우리 삶보다 크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어쩌면 세상을 다르게 보도록,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지 않나 기대해요. 저는 극장에서 평소에 보지 못한 풍경, 언어를 경험하며 우리가 서로를 조금 다르게 인식할 때 경이로움을 느껴요. 극단 작업 시에 수행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 참여한 사람들이 그 과정 안에서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목격하는 건 항상 근사한 일이죠. 그런 점에서 연극, 예술을 한다는 건 삶에서 작은 숭고함을 느끼는 일 같아요. 제게 있어 연극을 한다는 건 혁명의 차원이라기보단 현재까지 지속되는 과거들을 조금씩 바꾸는 일에 가까워요. 닫혀있던 창문을 조금씩 여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일에 가깝고, 작업을 통해 열수록 빛과 온도가 점점 절박해지니 마지막에는 다 열릴 때까지 하는 거죠. 어떻게 보면 지엽적이고 소극적인 이유지만 정치적 책임감보다는 지금 제 머리와 몸이 느끼는 불편이 동력이에요. 늘 이만큼 열었던 창문을 갑자기,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못 열게 한다면 다시 문을 열고 싶어지는 거죠. 꽤 오랜 시간 연극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해왔고, 시의성이 저를 규정하는 하나의 정체성이 되었다는 점을 최근에 실감하게 됐어요.


‹인터넷 이즈 씨리어스 비즈니스› ©두산아트센터

실험성, 난해함보다는 낯섦에 가까이
모든 예술에서 새로움이 일종의 존재 이유처럼 여겨지는 것 같아요. 저도 스스로 무엇이 새로운 것인지 질문하고, 관객에게도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언어를 던지려 해요. 새로운 것을 던졌는데 모두가 이해한다면 새롭지 않다는 반증이겠죠. 이렇게 작업을 하다 보니 관객이 공연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는 결론이 생겨요. 그럼 ‘관객이 이해하지 못하는 공연을 왜 하는 거지?’라는 질문이 또 이어지는데... 결국 공연 한 편을 만드는 것은 새로운 의사소통 가능성을 제안하고 그에 적극적으로 응하고픈 누군가를 만나는 일인 것 같아요. 난해하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난해가 아닌 낯섦이라 생각해요. 관객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말도 나오는데, 저는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은 말걸기로 보다 적극적으로 관객을 만나고 싶어요.

실패의 후일담
무언가 궁금해지고 의문을 갖는 순간, 그런 자기 관심사를 공동의 관심사로 발전시키면서 대부분의 작업이 시작돼요. 이후 구술증언이나 참고자료를 ‘채집’해 텍스트를 만들고, 장면화할 방안을 고민해요. 그러다 보니 기존의 연출 언어나 관습과는 구조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이 생기는 것 같아요. 10년 이상 작업하면서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적이 없는데, 그래서 역설적으로 저나 제가 속한 단체의 미학과 고민이 흐트러지지 않았어요. 한 작품이 큰 성공을 거뒀다면 그 노하우를 따랐을 텐데, 그렇지 않으니 매번 새롭게 하겠다는 욕망이 유지되었던 거죠. 저희는 합평을 ’실패의 후일담‘이라고 부르는데요. (웃음) 관객이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말을 걸고 있으니 성공할 리가, 성공할 수가 없는 거죠. 다 알아들으면 의도에 맞지 않으니까, 관객들이 좋아하고 많이 왔다면 정말 대실패인 거예요. (좌중 웃음) 실패의 후일담이라지만 의도를 생각하면 대부분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이런 이야기는 오독의 여지가 있어 조심스럽지만, 그렇게 제 작업이 설명되는 것이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기도 해요.

창작집단, 협업 그리고 공동창작
학생들에게 종종 얘기하지만, 최근 연출가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바쁜 사람들을 한 공간에 다 모으는 거예요. 그래서 매력 있는 작업의 구상과 설득력 있는 과정 설계가 중요한 덕목이 되고 있어요. 결국 하나의 이상과 미학을 바탕으로 공동체를 만드는 게 어려워졌다는 방증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연극에서는 일정 기간 같은 구성원들이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과정을 공유하면서 만들어내는 언어와 미학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봐요. 천재가 나와 판을 좌우하던 시대는 지난 것 같아요. 그래서 공동체가 지속하며 만들어내는 언어와 미학은 사유하는 방식으로서의 대안, 혹은 다른 패러다임이 될 수 있겠죠. 공동창작은 1인의 혁신적인 작품보다 집단적인 사유가 결론으로 도달하는 과정을 중시하는 작업 양식이니까요. 고전적인 서사와 기승전결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아 낯설 수도 있지만 그만큼 아직 박제되지 않은, 살아있는 언어를 만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기존의 연극 경험과는 다른 경험을 하게 되겠죠. 뿐만 아니라 십년 째 함께 작업하는 배우들도 긍정적으로 변화해가는 모습을 봐왔어요. 물론 저를 포함해서요. 비겁하지 않은 유연함, 경직이 아닌 단단함으로.


‹호신술› ©국립극단

2018년, 외적 성취와 내적 고민들
2018년은 제게 중요한 해인 것 같아요. 공무원이 되었고(웃음), 예술감독으로 일하는 등 도전과 고마운 일이 많았어요. 외적으로는 성취한 것들이, 내적으로는 고민이 많은 한해였어요. 미투 이후 일종의 변혁기를 겪으며 질문을 거듭하고 있어요. 솔직하게 아직 마땅한 실마리를 찾지 못한 것 같아요. 과거에 재밌게 읽었던 소설이 더는 그렇게 읽히지 않고, 희곡 안에서 여성혐오와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눈에 띄기 시작하는데... 이건 이전에 남성으로서 한국 사회에서 학습된 가치들을 부정하는 과정이라 고민이 많고, 선생의 위치에서는 더욱 조심스러워요. 이 논의들이 너무 지치지 않는 시간 안에 발전적인 고민으로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점과 점을 선으로 연결하고, 그 선이 나타내는 궤적으로 무엇의 형상을 확인한다. 여러 시기에 방점을 찍고 일화로 그 점을 연결하며, 더듬더듬 궤적을 짚어나갈 수 있었다. 짧은 대화로 모든 점을 메울 수 없었을지라도, 앞으로의 일화가 그 갈라진 틈을 메워 새로운 궤적을 그릴 것이다. 12월, 윤한솔 연출가는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호신술›을 올린다. 그 또한 궤적에서, 틈을 채우는 하나의 의미 있는 점 혹은 이야기가 되기를.

글 신소원 | 사진 김경수 | 영상 김건희


ⓒ싸우나스튜디오 김경수

소설가 김봉곤을 파주 출판단지에서 만났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AUTO›로 등단 이후 두 번째 만남이었으며, 그의 첫 소설집 ‹여름, 스피드›는 단연 지난 여름의 화제작이었다. 여름을 쓴 그이지만, 더위를 잘 타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오히려 어릴 적 교실 안에서 선풍기 두 개만으로도 버티던 교실을 생각하면서, 그때도 났는데 지금쯤이야 하며 버틴다고. 한여름의 신록이 우거진 길을 안내하는 그를 나는 천천히 뒤따랐다. 옅어진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편집자와 작가, 그 사이에서
2016년 등단 직후 문학동네에서 편집자 일을 시작했으니까, 작가 생활과 편집자 생활을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거죠. 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 어렵긴 하지만, 원칙은 ‘평일에는 소설을 절대 쓰지 않는다’는 거예요. 평일에는 구상 정도만 해두고 주말이나 연차를 이용해서 몰아 쓰는 편이에요. 편집자로서의 자아, 그리고 작가로서의 자아는 유기적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서도, 의도적으로 별개로 두려 노력하는 편이에요. 먼저 편집자로서는, 일단 모든 작가는 독자이니까 독자의 정체성을 갖고 일을 해요. 편견 없이 책을 읽다 보면 특히 좋았던 단어나 제게 크게 다가온 단어가 생기는데, 따로 적어두었다가 제 글에서 전혀 다른 맥락으로 심어놓곤 해요. 작가로서 편집일을 한다는 것은 한결 다른 차원의 작업이라 생각하는데, 한국 문학 편집자는 문장을 함부로 고치거나 수정 요구를 하기 어려운 보수적인 환경에서 일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저는 편집자와 작가의 관계가 합평과 유사하다고 느껴서, “이렇게 고쳐보는 건 어떨까요” 제안 정도는 해요. 저의 작가적인 모습을 숨기려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여름, 스피드› 그리고 사랑
‹여름, 스피드› 같은 경우는 여름에 발표할 소설이었어요. 한국 작가들은 계간지에 맞춰 소설을 발표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가급적 그 계절에 맞춰 소설을 쓰려고 해요. 여름은 일단 분자 활동이 아주 활발해지잖아요. 사랑과 착각할 만한 강렬함을 가진 계절이라고 생각해요. 봄에 꽃이 피지만 잎이 무성해지고 만개하는 시기는 여름이잖아요. 그게 사랑이 가진, 그리고 사랑할 때의 에너지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아요. ‹콜미 바이 유어네임›이나 최은영 작가의 ‹그 여름›에서도 그렇듯, 첫사랑이나 퀴어 같은 뜨거운 사랑이 여름을 배경으로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겠죠. 

소설 쓰기의 시작-우연의 연속
영상원 영화과에 입학 후 선배들의 추천으로 글쓰기 수업을 들었는데, 거기서 정이현 선생님을 만나 묘사, 진술과 같은 글쓰기를 체계적으로 익혔어요.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알아차리기보다는 그저 그 수업이 참 좋았어요. 그때부터 자연스레 서사창작과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죠. 2학년 때 강영숙 선생님의 ‹소설창작워크숍› 수업을 통해 본격적으로 소설을 써보겠다고 다짐했어요. 처음으로 단편소설의 꼴을 갖춘 작품을 쓰고 선생님이 해주신 격려, 칭찬들 덕에 영화만큼 소설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썰렁한 농담이긴 하지만 글쓰기는 영화완 달리 에코 예술이라서 끌리기도 했어요. 어떤 장르든 마감 시기에는 쓰레기, 설거지, 옷이 가득 쌓이는데, 소설 쓰기는 저희 집만 어지르는 일이잖아요. 어찌 되었든 제 선에서 수습 가능하다는 자각도 있었고요. 글쓰기는 협동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혼자서도 할 수 있는 내밀한 이야기에 더욱 집중할 수 있어요. 영화와는 달리 책임도, 찬사도 작가 본인이 짊어진다는 점이 오히려 편하고, 저랑 잘 맞아요. 그렇게 하고 싶었고요. 

경영학, 영화, 소설, 그리고 편집까지1
‘전향’에 있어 저만의 특별한 견해는 없어요. 다만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 하고 싶은 것이 또 생길 수 있잖아요. 고민하는 시간은 경우에 따라 아주 길어질 수 있겠죠.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고민이 무화될 만큼 굉장히 끌리는 순간이 와요. 그때는 제가 넘어가 버린 거니까, 고민할 필요도 없잖아요. 저는 그런 식으로 새로운 영역을 시도했어요. 무엇이 정말 하고 싶은지 계속 고민하다 보면, 결국 녹다운 되는 순간이 찾아올 거예요. 그때부터는 밀어붙이면 되는 거고요. 

자전적 소설, 그리고 공적인 글쓰기
자전적 글쓰기는 데뷔 이전부터 써왔던 형식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마음가짐은 충분히 준비된 상태였어요. 또한 아니 에르노, 필립 로스처럼 자전적 글쓰기를 하는 작가는 저 말고도 얼마든지 있고요. 수많은 에세이스트들도 있는데, 그들이 매번 상처를 받거나 악플에 시달리진 않잖아요. 저는 오히려 소설의 외양을 취했기 때문에 상처를 덜 받는 경우도 많아요. 가끔 제 글쓰기에 대한 평이 저라는 사람을 향한 직접적인 공격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어쨌든 글 안에 있는 저는 저이기도 하면서 제가 아니기도 하니까요. 이전 인터뷰에서 ‘공적인 글쓰기로 들어왔기 때문에 맷집을 길러야겠다’고 말했지만 결과적으로 글쓰기 방식이 달라지진 않았어요. 이전에는 문우들, 선생님으로부터 피드백을 받았다면 등단 후에는 문학 장내의 사람들, SNS나 행사에서 독자분들을 만나요. 하지만 처음부터 제가 추구했던 글쓰기는 아주 많은 대중 독자들보다는 저를 둘러싼 사람들을 고려한 것이었어요. 그렇다 보니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단단해질 수 있었기에 다른 글쓰기로 이어지지 않은 거죠. 저는 악플들도 빠짐없이 읽어요. 보지 않고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굴 수는 없는 타입이라 일단 보고 마음을 추스르는 편이에요. (웃음) 

‹여름, 스피드›에서 김봉곤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

‘나의 농도’ 
저는 글을 쓸 때 ‘나의 농도’라는 표현을 즐겨 써요. 등단작 ‹AUTO›의 경우는 나의 농도가 아주 짙은 소설이에요. 제가 들어가긴 하지만 실제로는 없었던 일인 ‹컬리지 포크› 같은 소설도 있어요. 저는 교토조형예술대학의 교환학생이었던 적이 없어요. 우연히 친구들과 간 여행에서 카페 ‘뮤’를 찾았고, 교토조형예술대학이 우리 학교와 자매학교라는 점을 알고 활용한 거예요. 하지만 소설의 반절을 차지하는 전 애인과의 관계와 생활은 또 사실이에요. 허구와 현실의 조합인 ‹컬리지 포크›가 있다면 현실의 농도가 매우 높은 ‹AUTO›도 있는 거죠. 

명명하는 일, 퀴어와 퀴어 소설
소설에서 낡은 티셔츠가 아니라 ‘낡은 게스 티셔츠’라고 언급하는 이유는, 우스갯소리로 운을 떼자면 어린 시절부터 메이커를 밝히는 아이였기 때문이에요. 그 물건, 그 지명, 그 꽃을 정확하게 호명하고 싶어요. 바로 ‘그것’을 지목하고 싶은 거죠. 아마 제 정체성과도 긴밀하게 연관을 맺고 있겠죠. 

뭉뚱그려진 표현이 아니라 그 사람을 ‘게이’, ‘레즈’라고, 내가 ‘나’라고 말하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하지만 제 소설이 선정적이라는 리뷰에는 동의할 수 없어요. 오히려 ‹컬리지 포크› 같은 경우는 더 선정적이지 못해 아쉬운 마음도 들어요. 선정적이라는 기준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그리고 낯선 성애 장면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정확한 단어를 지목하고 그를 선명하게 표현하고 싶어요. 

사랑에 대해 쓴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사랑했던 기억에 관해 쓰는 이유는 일단 제가 원하기 때문이에요. 소설을 쓸 때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겠다, 혹은 기막힌 통찰력을 보여주겠다는 생각보다는 당시 제가 느꼈던 감정과 제가 봤던 풍경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요. 권희철 평론가가 해설에서 인용한 롤랑 바르트의 문장 ‘자신이 간청한 존재들을 그리기 위해 소설을 썼고, 자신이 사랑한 사람들을 축성하기 위해 소설을 썼다’라는 구절도, 제가 이해한 바가 맞다면 정확하게 제가 하고 싶은 작업과 일치해요. 그 문장은 프루스트가 썼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해요. 많은 인물 군상을 보여준 이유가 그들을 소설 속에서 다시 한번 살게 하는 것이었다면요. 저 또한 쓰고 싶은 사람을 축성하고, 다시 한번 살게 하는 소설을 추구하고 있거든요. 

그가 앞으로 쓸 이야기
제 소설에 대해 들었던 최고의 말은, 평론가 황현경 선생님께서 하신 ‘이렇게나 비문학적으로 훌륭한 최악의 걸작’이었어요. 비문학적이라는 말에 생각해볼 여지도 있었고, 제가 들을 수 있는 굉장한 칭찬이라고 느껴졌어요. 제가 쓰는 것이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해도, 그 또한 사랑의 변주이고 사랑의 다른 모습일 거라 생각해요. 10월부터는 창비 문학지 ‹문학3›에서 중편 소설을 연재하기로 했어요. ‹마이 리틀 러버›라는 가제를 정했고, ‹컬리지 포크›와 ‹AUTO›에 등장했던 전 애인을 이야기하는 연애 소설이에요. 그와 헤어지거나 끝나는 이야기만 썼었는데, 이번에는 시작하는 과정부터 천천히 써보려고 해요. 

부드럽게, 때로는 장난스럽게 답해 오는 그의 뒤로 큰 창을 통해 진녹색의 여름이 쏟아졌다. 그때 나는 이 여름의 지독한 빛이 처음으로 따뜻하다고 느껴졌다. 가히 사랑과 착각할 만한 여름날이 끝나감에도, 어쩐지 외롭지는 않았다. 그가 전해줄 새 계절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 김봉곤 작가의 추천 도서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스완의 사랑› 필립 로스, ‹울분›

글 신소원 | 사진 김경수 | 영상 이세연
1 김봉곤 작가는 한예종 입학 전 경영학과에서 공부하다 그만둔 바 있다. 이후 영화과 예술사, 서사창작과 전문사를 이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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