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문학, 자음과모음. 유수 문예지가 최근 몇 년간 대거 휴·폐간했다. 통폐합된 학과의 첫 번째 기수 출신인 나는 그런 일에 꽤 면역되어있는 편임에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학교 측의 일방적 통보에 항의하며 총장실을 점거하고 밤새도록 문학 이야기를 했다던 선배들의 모습은, 마치 실제로 본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진다. 나의 학부는 국어국문학과 문예창작학을 그대로 이어붙인 이름을 갖게 되었다. 선배들은 통폐합된 우리였더라도 이전과 같이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학년을 거듭하며, 우리가 단일 학과로 취급되기엔 너무 많은 학생과 너무 많은 과목을 감당해야 한다는 점이 드러나고야 말았다. 그때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노력해서 얻는 사랑은 종국에는 실패하고 만다는 사실을. 어쩌면 선배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질 것이 뻔한 싸움에서, 쉽게는 져주지 않으려 버티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끝내 통폐합되어버리는 무엇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마음을 헤아릴 때면, 그리고 지금의 나보다 어렸을 그들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나는, 

이상하게 외로웠다. 괜히 힘들었다. 심지어 슬펐다.


무자비한 Trendy와
이젠 바꿀 수 없는 Trace의 사이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은 ‘시대비평’이라는 인문 교양 잡지가 사실상 폐간과 다름없는 휴간을 맞기 전,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겨울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바냐를 이어받은 김남건 팀장에게 시대비평이 맞는 마지막 겨울은 여전히 ‘죽기 좋은 날씨’다. 새로 부임해 온 편집장과의 의견 충돌 전에도, 남건의 안에는 자신이 믿고 걸어온 길에 대한 회의가 조금씩 자라났다. 몇 해 전 인턴이었던 정샘이가 만난 똑똑하고 명쾌했던 남건의 눈은 이제 빛을 잃었다. 그럼에도 편집장이 부르짖는 트렌디는 무작정 휩쓸어버리는 파도 같아서, 다 휩쓸려갈 때 누군가는 굳건히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그저 그 자리를 꼭 붙들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한다. 편집장에게 삿대질하며 소리 지르는 김남건에게서, 끝까지 남아 일을 마무리하는 정샘이에게서, 새로운 기회와 미래를 꿈꾸는 박용우에게서, 무언가 짐작하고 고개를 돌려버린 강수혜에게서, 아무렴 괜찮다고 말하는 팽지인에게서, ‘살리고, 살리고’를 슬프게 말하는 조형래에게서, 지겹다고 혼잣말하는 서상원에게서. 나와 나의 선배들을 본다. 변해버린 시대 안에서 변하지 못한 사람들이 서성인다. 내게는 전부와 같은 세계가 누군가에게는 ‘시대’에 뒤처진 무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면 꽤 오래 서성여야 한다.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 ©두산아트센터

말의 무용함

그 이름마저도 대단한 과학-철학자 박용우는 말이 많다. 라플라스의 악마, 진화론, 꿈에 대한 이야기들이 극중에 산발적으로 펼쳐진다. 나와 당신의 상황에 대해, 우리가 처한 시대에 대해 끝없이 늘어놓는 말들은 이를 정확히 인식하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최종적인 판단을 유보하는 일이기도 하다. 트렌디를 대표하는 서상원 편집장의 말은, 아, 정말 무자비하다. ‘그래서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남건은 기가 차서 한숨을 쉬고, 답답해서 가슴을 친다. 아무리 말하더라도 이해받을 수 없는 감정이라는 사실만 증명되었기에. 남건과 용우가 덧붙이던 말들은 결국 시대비평이 이 ‘시대’를 따라갈 수 없다는 답을 최대한 미루고 싶어 꼬리를 물던, 그 답을 막기 위해 봇물처럼 터져나온 임시방편이었다. 극의 후반부까지 그러한 결론이 점차 극명해진다. 그래서일까, ‹컬쳐 브랜딩›과의 통폐합을 알리는 술자리에서 강수혜는 말이 시작되기도 전에 고개를 돌려버린다. 사실은 모두가 예감하고 있었던 말이 끝내 나온 그 시점에, 움직이는 것은 강수혜의 고개뿐이다.


당신은 정말로
‘아무거나’ ‘괜찮아?’ ‘상관없어?’

편집장의 젊은 애인이자 디자이너인 팽지인은 이상한 말버릇을 갖고 있다. 뭐가 먹고 싶으냐는 질문엔 ‘아무거나’, 일이 어떻냐는 질문엔 ‘괜찮아’, 힘들지 않으냐는 질문엔 ‘상관없어’. 끝도 없이 말을 쏟아내면서 진짜 비극을 유보하는 남건과 용우의 반대편에는 끝이 미처 찾아오기도 전에 이미 이를 예감하고 마음을 닫아버린 팽지인이 있다. 그러나 남건은 그녀를 ‘진짜’ 라고 평하며 박하사탕을 건네고, 용우는 그녀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렇잖아, 우리는 비슷하잖아.” 그들이 ‘진짜’인 지인과 새로운 미래를 그리기 위해 쓰는 방법은 ‘우리’에 편입시키는 것이다. 나와 네가 닮았다는 말은 이해와 공감인 동시에 다른 차원의 폭력이 되어 극 초반 외부인 같기만 하던 지인을 서성이게 만든다. 남건의 말은 폭력이었다가도, 용우의 입맞춤은 이해와 확인이 되기도 한다. 아무거나 괜찮고 상관없다는 지인은, 그 찰나의 입맞춤에서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아무렇든 괜찮지 않다는 것을, 상관 없지 않다는 사실을.


싸한 단맛의 박하사탕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은 가족도 일자리도 꿈도 잃어버린 남자가 생의 어떤 지점들을 돌아보며 그것이 혹시 ‘잘못 찍힌’ 점은 아니었는지 돌아보는 서사다. 영화의 명대사는 단연 남자가 기찻길에서 시뻘개진 눈으로 외치는 ‘나, 돌아갈래!’다. 남건도 그 남자와 닮았다. 남건은 요즘은 자꾸 나이 헛먹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같은 말을 읊조리며 술만 넘긴다. 다음 날 겉옷 주머니에는 술집에서 담아 왔을 박하사탕이 가득하다. 주머니에서 나온 박하사탕이 사무실 책상에 나뒹구는 모습이 퍽 애처롭다. 체호프는 ‹바냐 아저씨›를 희극이라 칭했다. 당대에 스타니슬랍스키가 연출한 후 이 작품은 나이 든 바냐의 비극으로 오래 인기를 끌었다. 지금의 관객 또한 그때와 다르지 않다. 남건의 투정, 샘이의 활기, 형래의 기타 연주에 웃으면서도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그들의 삶을 읽고 운다. 편집장이 통폐합 소식을 전할 때 남건은 이제는 내가 못해먹겠다고 선언하며 가슴에 품고 다니던 사표를 내던진다. 시대비평과 자신을 동일시하던 남건에게 시대비평의 끝은 자신의 종말과도 같은 무게를 지녔을 것이다. 하지만 겨우 사표다. 총을 들었던 바냐가 그 총으로 아무도 맞히지 못했던 것처럼, 사표 또한 꼬깃꼬깃 접힌 모양이었다. 그것을 보고 옅게 웃음이 났다. 그 사표에서 박하사탕의 싸한 단맛이 났다.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 ©두산아트센터

자, 일을 해야지

‘시대비평’과 ‘컬쳐브랜딩’은 나의 학과처럼 둘을 합친 이름도 되지 못할 것 같다. 시대를 꿰뚫어 보던 눈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법을 배우거나 ‘알아두면 쓸 데있는’ 같은 자조적인 수식어를 붙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 ‘시대비평’과는 대척점에 있는 듯 보이는 편집장까지 내뱉을 만큼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삶은 참 지겹다. 하지만 ‘시대비평’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남는다 해도 ‘시대’는 누구에게 부탁해야 하나? 사람은 괜찮아, 상관없어, 아무거나, 하며 만족하고 살 수 있다. 그것이 실패인지, 포기인지, 무덤덤한 승리인지 굳이 따지지 않고서도. 그러나 저 무거운 계간지 더미들은, 시대를 봤던 그 눈으로 이제 어디를 보아야 하지. 그런 마음이 무겁게 자리하는 가운데, 남건은,
일을 해야지.
하고 덧붙인다.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말이 그뿐인 상황에서 “우리는 그냥 해야지, 일을 하자.” 이렇게 말한다. 원작 발표 후 백 년이 더 흘렀지만, 그보다 나은 말이 없어 같은 끝을 맺었으리라. 우리는 엄청난 확률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나직한 용우의 읊조림과 함께.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고민하지 말고 우선은 이 길을 묵묵히 가자고. 우습게도 나 또한 그보다 합당한 제안을 할 능력이 없다. 아니, 이 지면에서는 그렇게 말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 같다.

비슷한 사람들아, 우리의 오늘이 비록 잘못 찍은 점처럼 느껴진다고 해도 아프지 맙시다. 대신에 우리, 자, 일을 합시다.

글 신소원
1 김광진의 곡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의 가사 일부다. 윤성호 작가의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과 동제로, 윤성호 작가 또한 이 곡에서 제목을 따 왔다고 밝혔다.
2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의 원안은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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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자유/ 김재엽/ 두산아트센터  (0) 2017.09.22

ⓒ싸우나스튜디오 김경수

소설가 김봉곤을 파주 출판단지에서 만났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AUTO›로 등단 이후 두 번째 만남이었으며, 그의 첫 소설집 ‹여름, 스피드›는 단연 지난 여름의 화제작이었다. 여름을 쓴 그이지만, 더위를 잘 타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오히려 어릴 적 교실 안에서 선풍기 두 개만으로도 버티던 교실을 생각하면서, 그때도 났는데 지금쯤이야 하며 버틴다고. 한여름의 신록이 우거진 길을 안내하는 그를 나는 천천히 뒤따랐다. 옅어진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편집자와 작가, 그 사이에서
2016년 등단 직후 문학동네에서 편집자 일을 시작했으니까, 작가 생활과 편집자 생활을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거죠. 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 어렵긴 하지만, 원칙은 ‘평일에는 소설을 절대 쓰지 않는다’는 거예요. 평일에는 구상 정도만 해두고 주말이나 연차를 이용해서 몰아 쓰는 편이에요. 편집자로서의 자아, 그리고 작가로서의 자아는 유기적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서도, 의도적으로 별개로 두려 노력하는 편이에요. 먼저 편집자로서는, 일단 모든 작가는 독자이니까 독자의 정체성을 갖고 일을 해요. 편견 없이 책을 읽다 보면 특히 좋았던 단어나 제게 크게 다가온 단어가 생기는데, 따로 적어두었다가 제 글에서 전혀 다른 맥락으로 심어놓곤 해요. 작가로서 편집일을 한다는 것은 한결 다른 차원의 작업이라 생각하는데, 한국 문학 편집자는 문장을 함부로 고치거나 수정 요구를 하기 어려운 보수적인 환경에서 일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저는 편집자와 작가의 관계가 합평과 유사하다고 느껴서, “이렇게 고쳐보는 건 어떨까요” 제안 정도는 해요. 저의 작가적인 모습을 숨기려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여름, 스피드› 그리고 사랑
‹여름, 스피드› 같은 경우는 여름에 발표할 소설이었어요. 한국 작가들은 계간지에 맞춰 소설을 발표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가급적 그 계절에 맞춰 소설을 쓰려고 해요. 여름은 일단 분자 활동이 아주 활발해지잖아요. 사랑과 착각할 만한 강렬함을 가진 계절이라고 생각해요. 봄에 꽃이 피지만 잎이 무성해지고 만개하는 시기는 여름이잖아요. 그게 사랑이 가진, 그리고 사랑할 때의 에너지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아요. ‹콜미 바이 유어네임›이나 최은영 작가의 ‹그 여름›에서도 그렇듯, 첫사랑이나 퀴어 같은 뜨거운 사랑이 여름을 배경으로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겠죠. 

소설 쓰기의 시작-우연의 연속
영상원 영화과에 입학 후 선배들의 추천으로 글쓰기 수업을 들었는데, 거기서 정이현 선생님을 만나 묘사, 진술과 같은 글쓰기를 체계적으로 익혔어요.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알아차리기보다는 그저 그 수업이 참 좋았어요. 그때부터 자연스레 서사창작과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죠. 2학년 때 강영숙 선생님의 ‹소설창작워크숍› 수업을 통해 본격적으로 소설을 써보겠다고 다짐했어요. 처음으로 단편소설의 꼴을 갖춘 작품을 쓰고 선생님이 해주신 격려, 칭찬들 덕에 영화만큼 소설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썰렁한 농담이긴 하지만 글쓰기는 영화완 달리 에코 예술이라서 끌리기도 했어요. 어떤 장르든 마감 시기에는 쓰레기, 설거지, 옷이 가득 쌓이는데, 소설 쓰기는 저희 집만 어지르는 일이잖아요. 어찌 되었든 제 선에서 수습 가능하다는 자각도 있었고요. 글쓰기는 협동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혼자서도 할 수 있는 내밀한 이야기에 더욱 집중할 수 있어요. 영화와는 달리 책임도, 찬사도 작가 본인이 짊어진다는 점이 오히려 편하고, 저랑 잘 맞아요. 그렇게 하고 싶었고요. 

경영학, 영화, 소설, 그리고 편집까지1
‘전향’에 있어 저만의 특별한 견해는 없어요. 다만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 하고 싶은 것이 또 생길 수 있잖아요. 고민하는 시간은 경우에 따라 아주 길어질 수 있겠죠.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고민이 무화될 만큼 굉장히 끌리는 순간이 와요. 그때는 제가 넘어가 버린 거니까, 고민할 필요도 없잖아요. 저는 그런 식으로 새로운 영역을 시도했어요. 무엇이 정말 하고 싶은지 계속 고민하다 보면, 결국 녹다운 되는 순간이 찾아올 거예요. 그때부터는 밀어붙이면 되는 거고요. 

자전적 소설, 그리고 공적인 글쓰기
자전적 글쓰기는 데뷔 이전부터 써왔던 형식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마음가짐은 충분히 준비된 상태였어요. 또한 아니 에르노, 필립 로스처럼 자전적 글쓰기를 하는 작가는 저 말고도 얼마든지 있고요. 수많은 에세이스트들도 있는데, 그들이 매번 상처를 받거나 악플에 시달리진 않잖아요. 저는 오히려 소설의 외양을 취했기 때문에 상처를 덜 받는 경우도 많아요. 가끔 제 글쓰기에 대한 평이 저라는 사람을 향한 직접적인 공격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어쨌든 글 안에 있는 저는 저이기도 하면서 제가 아니기도 하니까요. 이전 인터뷰에서 ‘공적인 글쓰기로 들어왔기 때문에 맷집을 길러야겠다’고 말했지만 결과적으로 글쓰기 방식이 달라지진 않았어요. 이전에는 문우들, 선생님으로부터 피드백을 받았다면 등단 후에는 문학 장내의 사람들, SNS나 행사에서 독자분들을 만나요. 하지만 처음부터 제가 추구했던 글쓰기는 아주 많은 대중 독자들보다는 저를 둘러싼 사람들을 고려한 것이었어요. 그렇다 보니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단단해질 수 있었기에 다른 글쓰기로 이어지지 않은 거죠. 저는 악플들도 빠짐없이 읽어요. 보지 않고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굴 수는 없는 타입이라 일단 보고 마음을 추스르는 편이에요. (웃음) 

‹여름, 스피드›에서 김봉곤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

‘나의 농도’ 
저는 글을 쓸 때 ‘나의 농도’라는 표현을 즐겨 써요. 등단작 ‹AUTO›의 경우는 나의 농도가 아주 짙은 소설이에요. 제가 들어가긴 하지만 실제로는 없었던 일인 ‹컬리지 포크› 같은 소설도 있어요. 저는 교토조형예술대학의 교환학생이었던 적이 없어요. 우연히 친구들과 간 여행에서 카페 ‘뮤’를 찾았고, 교토조형예술대학이 우리 학교와 자매학교라는 점을 알고 활용한 거예요. 하지만 소설의 반절을 차지하는 전 애인과의 관계와 생활은 또 사실이에요. 허구와 현실의 조합인 ‹컬리지 포크›가 있다면 현실의 농도가 매우 높은 ‹AUTO›도 있는 거죠. 

명명하는 일, 퀴어와 퀴어 소설
소설에서 낡은 티셔츠가 아니라 ‘낡은 게스 티셔츠’라고 언급하는 이유는, 우스갯소리로 운을 떼자면 어린 시절부터 메이커를 밝히는 아이였기 때문이에요. 그 물건, 그 지명, 그 꽃을 정확하게 호명하고 싶어요. 바로 ‘그것’을 지목하고 싶은 거죠. 아마 제 정체성과도 긴밀하게 연관을 맺고 있겠죠. 

뭉뚱그려진 표현이 아니라 그 사람을 ‘게이’, ‘레즈’라고, 내가 ‘나’라고 말하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하지만 제 소설이 선정적이라는 리뷰에는 동의할 수 없어요. 오히려 ‹컬리지 포크› 같은 경우는 더 선정적이지 못해 아쉬운 마음도 들어요. 선정적이라는 기준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그리고 낯선 성애 장면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정확한 단어를 지목하고 그를 선명하게 표현하고 싶어요. 

사랑에 대해 쓴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사랑했던 기억에 관해 쓰는 이유는 일단 제가 원하기 때문이에요. 소설을 쓸 때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겠다, 혹은 기막힌 통찰력을 보여주겠다는 생각보다는 당시 제가 느꼈던 감정과 제가 봤던 풍경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요. 권희철 평론가가 해설에서 인용한 롤랑 바르트의 문장 ‘자신이 간청한 존재들을 그리기 위해 소설을 썼고, 자신이 사랑한 사람들을 축성하기 위해 소설을 썼다’라는 구절도, 제가 이해한 바가 맞다면 정확하게 제가 하고 싶은 작업과 일치해요. 그 문장은 프루스트가 썼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해요. 많은 인물 군상을 보여준 이유가 그들을 소설 속에서 다시 한번 살게 하는 것이었다면요. 저 또한 쓰고 싶은 사람을 축성하고, 다시 한번 살게 하는 소설을 추구하고 있거든요. 

그가 앞으로 쓸 이야기
제 소설에 대해 들었던 최고의 말은, 평론가 황현경 선생님께서 하신 ‘이렇게나 비문학적으로 훌륭한 최악의 걸작’이었어요. 비문학적이라는 말에 생각해볼 여지도 있었고, 제가 들을 수 있는 굉장한 칭찬이라고 느껴졌어요. 제가 쓰는 것이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해도, 그 또한 사랑의 변주이고 사랑의 다른 모습일 거라 생각해요. 10월부터는 창비 문학지 ‹문학3›에서 중편 소설을 연재하기로 했어요. ‹마이 리틀 러버›라는 가제를 정했고, ‹컬리지 포크›와 ‹AUTO›에 등장했던 전 애인을 이야기하는 연애 소설이에요. 그와 헤어지거나 끝나는 이야기만 썼었는데, 이번에는 시작하는 과정부터 천천히 써보려고 해요. 

부드럽게, 때로는 장난스럽게 답해 오는 그의 뒤로 큰 창을 통해 진녹색의 여름이 쏟아졌다. 그때 나는 이 여름의 지독한 빛이 처음으로 따뜻하다고 느껴졌다. 가히 사랑과 착각할 만한 여름날이 끝나감에도, 어쩐지 외롭지는 않았다. 그가 전해줄 새 계절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 김봉곤 작가의 추천 도서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스완의 사랑› 필립 로스, ‹울분›

글 신소원 | 사진 김경수 | 영상 이세연
1 김봉곤 작가는 한예종 입학 전 경영학과에서 공부하다 그만둔 바 있다. 이후 영화과 예술사, 서사창작과 전문사를 이수했다.


3. 잃어버려지기, 하지만 포기하면 정말 편한 지는 미지수.







희곡분석 수업에서 <바냐 아저씨>를 읽었다. 데이비드 불 같은 사람의 이론서와 작품을 연결해서 세 시간 남짓 줄곧 이야기를 나누는 수업이다. 인물은 변해야 한다, 였나 그런 챕터를 읽던 중이었다. 선생님이 물었다.

 

인물은 변하나요? 바냐는 변했나요? 에서 시작된 질문이,

희곡에서 인물은 변해야 할까요? 로 확장되었다.

 

바냐는 변했다, 바냐는 안 변했다 설전이 오갔다. 나는 바냐는 변하지 않았다는 쪽의 편을 들었다. 한 편의 희곡 안에서 인물이 변하느냐는 질문은 결국 사람이 변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작가가 가진 인간관과 작품 내 인물의 변화여부는 동일하다. 나의 경우는 굳이 따지자면 사람은 변한다는 주의에 가깝다. 하지만 희곡에서 설정한 시간 안에서는 그것이 작동하지 않아야 맞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무언가를 자각해야 변화하는데, 그 자각은 목표로 추구하던 것 혹은 소중하다고 여겼던 것을 잃는 것에서 온다. 바냐의 경우는 가진 것이 애초에 없었던 사람이었기에 변화하지 않았다. 그의 생애에 걸친 상실과 그에 대한 급작스런 자각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 안에서는 자각이 전부일 뿐 실제로 잃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죽거리는 것이 전부였고, 닥치라면 닥칠 뿐이었다. 심지어 그 많은 인물들이 있는 곳에다 총을 쏘는 데 아무도 맞지 않는다. 상당히 시트콤스러운 상황이다. 체홉이 <바냐 아저씨>를 희극이라 이름 붙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결국 연애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는 명언이 있는데, 실제로 그것은 일대일 관계에서는 진리에 가깝다. 결국 누군가는 누군가를 잃어야 변화의 필요를 느낀다. 그래서 다음 연애에서 조금 달라진 자기를 인식하지도 않나. 나랑은 그렇지 않았던 사람이 새 애인을 만나고서 변했다고 서운해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나를 잃었기 때문에 변화하는 것이므로. , 상당히 나에게 유리한 합리화가 이루어졌다.

이런 합리화 끝에, 나는 잃어버려지기를 택했다. 자기 인생을 괴롭게 하는 방식을 바꿨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말로 밀어붙이던 것을 관두었다. 그 과정에 내가 동참하고 지속적으로 관여하겠다는 욕심도 내려두었다. 대신 상실로서 변화히기를 바랬다.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그는 바이올린을 켜는 그 여자를 자신이 그렇게 떠나보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물론 이제 그는 그녀의 자기희생적인 제안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그의 확실한 사랑과,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으니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그의 다독거림뿐이었다. 사랑과 인내가, 그가 이 두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만 했어도, 두 사람 모두를 마지막까지 도왔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들의 아이들이 태어나서 삶의 기회를 가졌을 것이고, 머리띠를 한 어린 소녀가 그의 사랑스러운 친구가 되었을까.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그렇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다. 체실 비치에서 그는 큰 소리로 플로렌스를 부를 수도 있었고, 그녀의 뒤를 따라갈 수도 있었다. 그는 몰랐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이제 그를 잃을 거라는 확신에 고통스러워하면서 그에게서 도망쳤을 때, 그때보다 더 그를 사랑한 적도, 아니 더 절망적으로 사랑한 적도 결코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그녀에게는 구원의 음성이었을 것이고, 그 소리에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을 거라는 사실을. 대신, 그는 냉정하고 고결한 침묵으로 일관하며 여름의 어스름 속에 선 채, 그녀가 허둥지둥 해변을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힘겹게 자갈밭을 헤쳐나가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작은 파도들이 부서지는 소리에 묻히고, 그녀의 모습이 창백한 여명 속에서 빛나는 쭉 뻗은 광활한 자갈밭 길의 흐릿한 한 점으로 사라져갈 때까지.


p197-198

 

 

무언가를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소중한 것을 잃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인간관인데, 이언 매큐언도 그것과 유사한 생각을 가진 듯하다. 때문에 <체실 비치에서>의 에드워드는 변한다. 그의 과거와 현재가 마지막 문장에서 만난다. 플로렌스가 에드워드를 상실한 채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이루었던 미래, 어쩌면 그 또한 포함되었을지도 모르는 한 폭의 풍경, 하지만 9C 좌석은 다른 사람으로 채워졌다. 소중한 것을 잃고난 후 변한다는 인간관은 플로렌스와 에드워드에게는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현실에서는 그런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잃어버려지는 것이 낫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지지부진하게 놀지도 못하고, 게다가 상대를 힘들게까지 만들면서 무엇을 지속해야 할 이유는 없다. 차라리 그로써 우리 모두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 편이 낫다.

 

 


그리고 설령 에드워드가 이 리뷰를 읽었다 해도, 객석에 불이 켜지고 빛 때문에 눈이 부셨던 젊은 연주자들이 열광적인 박수갈채에 화답하기 위해 일어섰을 때, 1바이올린 주자가 저절로 세번째 줄 중앙의 9C 좌석으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을 어찌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그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알 수 없었으리라, 플로렌스 외에는, 아무도.


p193



애석하게도 나는 인정하기 싫었다. 내가 당연히 할 수 있는 배려와 마음씀씀이에 잘게 고마워하고, 별 것 아닌 일에 수도 없이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미래를 향한 문이 영원히 차단되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앞으로의 생에서 나는 종종 당신을 떠올리며 이상한 후회에 사로잡히리라는 예감을. 더이상 관여할 수 없게 된 관계와 미래 같은 것들에 대해 곱씹으며, 만약 다른 선택을 할 용기가 우리에게 있었다면 어땠을까 공상하게 되는 취미가 생기게 될 것을. 잠깐 내게 닿았던 당신의 말을 오래도록 그리워하고, 전철역 앞에서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서성이던 당신을 관찰했던 일이 이제는 먼 과거의 기억이 되리라는 사실을.

한때 나는 스스로가 좋은 끝에 이르고 싶어 그를 추구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다르게 말하자면, 결국 나는 끝을 보는 것이 두려워 어쨌든 유보하고 보는 인간이란 뜻이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결국 인정하고야 만다. 하지만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당신과 이것 저것 하고 싶었고, 이렇고 저런 미래도 그려봤어, 어려움이 있겠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극복하게 될 거야. 현실에서 그런 말을 상대에게 전하려면 아주 사랑한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사랑의 상태에 가까워졌다는 자각만 있을 뿐, 사랑한다는 확신은 없다. 그래서 플로렌스의 더듬거리지만 명확하고 빠른 말을 읽어보는 데에서 만족한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해봤고, 또 생각처럼 그렇게 터무니없는 얘기는 아니야. 내 말은, 처음엔 그렇게 들릴지도 모른다는 거야.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어. 이건 기정 사실이야. 우리 둘 다 의심하지 않는 사실이지. 우린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이미 알고 있어. 이제 우린 자유롭게 우리 자신만의 선택을 할 수 있고 우리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나갈 수 있어. 이젠 정말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자유로운 주체들인 거지! 그리고 지금은 사람들이 살아나가는 방식도 각양각색이야. 허락받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에게 물어볼 필요 없이 그들만의 규칙과 기준에 따라서 살 수 있어. 엄마가 동성애자 두 명을 아는데 그들은 마치 남편과 아내처럼 같은 아파트에 함께 살고 있대. 남자 둘이, 옥스퍼드의 보몬트 가에서. 그들은 둘 다 크라이스트처치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데 이 사실을 쉬쉬하고 있지. 그래서 아무도 그들을 귀찮게 하지 않아. 그리고 우리도 우리만의 규칙을 만들 수 있어. 내가 지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야. 내 말은, 바로 이거야. 에드워드, 난 당신을 사랑해.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살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그 누구도, 아무도…… 아무도 우리가 뭘 했고 뭘 하지 않았는지 모를 거야. 우리는 함께 있고, 함께 살 수 있을 테고, 그리고 당신이 원한다면, 정말로 원한다면,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당연히 그런 일이 있겠지, 난 이해할 거야. 아니 그 이상으로, 그걸 원할 거야. 내가 그러는 건 당신이 행복하고 자유롭게 되길 바라기 때문이야.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아는 한 절대로 질투하지 않을 거야.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음악을 연주할 거야. 내가 인생을 살면서 하고 싶은 건 이것뿐이야. 솔직하게 말할게. 난 단지 당신 곁에 있으면서, 당신을 돌보고, 당신과 함께 행복해하고, 사중주단과 일하고, 언젠가 위그모어 홀에서 모차르트처럼 아름다운 곡을, 그런 곡을 당신을 위해 연주하고 싶을 뿐이야.

p 183-184




그리고 이렇게, 또 한 계절을 정리한다.

민선이가 묻는다. 언니, 글이 왜 도피처야?

나는 답한다. 만약에 내가 느끼는 문제들을 삶에서 해결할 용기가 있었다면, 또는 이 세계가 그것을 충분히 해결해줄 수 있는 곳이었다면 아마도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런데 그렇게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생겨났고, 점점 커졌다. 결국 나는 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2. 수영이 말했다.

 소원 너는 다 보여. 너 말 빨라지는 거 알아? 머릿속에 생각이 다섯 개는 가동되어서 쉴틈없이 말해.”





그녀가 자신의 메시지를 순화시키거나 자기 말이 좀 더 비현실적으로 들리게 할 양으로 일찌감치 생각해두었던 이 대담무쌍한 작은 농담에도 에드워드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바닷가를 등지고 선 판독 불가능한 이차원의 형체였고 전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흘러내려온 상상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기 위해 이마에 손을 올렸다. 불확실하고 떨리는 손동작이었다. 녀는 또박또박 이야기했지만 초조함에 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얇아져가는 빙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지치는 사람처럼 그녀는 익사하지 않기 위해 전속력을 냈다. 그녀는 맹렬한 기세로 문장들을 쏟아냈다. 오로지 속도만이 의미를 생성한다는 듯이, 덩달아 그도 함께 모순들을 그냥 지나치도록 몰아붙일 수 있고, 또 자신의 의도대로 그를 아주 빠르게 휘둘러 그가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은 빨랐어도 발음이 흐려지진 않았기 때문에, 사실 그녀는 절망하기 일보직전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말은 기운차게 들렸다.

 

p182



근래의 나는 울고 싶어도 잘 울지 못했다. 내가 한두 살 나이를 먹고 있단 사실을 이럴 때에 느낀다. 이전이었다면 억울해서, 화가 나서, 연민이 들어서 같은 이유로 쉽게 차올랐던 눈물을 통제한다. 그런 힘을 터득했다. 아무리 눈물이 나도 울어서는 안 되는 순간들이 점차 많아졌다. 솔직함이 더이상 방패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내게 허락된 것은 예의를 다하는 일이지 솔직한 감정 표현이 아니었다. 놀이치료사를 겸하고 있는 중년의 동화 작가는 웜 하트, 쿨 헤드라는 말이 도움이 될 것이라 조언했다. 안 됐다는 표정으로, 이따금 팔 언저리를 쓸어 만졌다. 각운이 맞는 단어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나는 지금의 내 상태가 그 조언에 맞춰져가는 과정인지 따져본다. 쿨 헤드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뜨거워져도, 머리 위로는 그걸 보이지 말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상태가 몇 시간씩 지속되자 울음을 삼키는 데에 익숙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문에 늦은 밤 찾아오는 두통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의 방식만큼이나 나 또한 내 삶을 지키는 진부하고 오래된 방식을 놓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아주 견고했다. 절대 놓지 못하는 것, 삶 전반에 깊은 뿌리를 내리도록 허락한 것들에는 항상 효용이 있다. 나의 방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서-(또다시 나도 당신들도 지겹고 진부해서 듣기만 해도 미쳐버리는 그 사랑이다-), 관념적인 단어들이나 절대 변하지 않는 우리의 기질 문제 같은 것을 화두로 올려 상대를 괴롭히는 일이다. 실제로 나는 친구들을 만나 그들을 웃기고 울리면서 내 감정을 어느 정도 풀었다. 친구들은 울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울어주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들과 나의 기질상 쉽게 행할 수 있는 배려와 마음 씀씀이에 잘게 고마워하고, 별일도 아닌 행동에 가슴 언저리가 휑하게 빈 것 같은 죄책감을 느껴 수도 없이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어쩐지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지 못했다. 나는 메마른 눈으로 지켜봤다. 속 어딘가에서는 이또한 언젠가 후회하는 순간이 되리라는 불안이 있었다.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 걸까.

 

사실 나는 그 방법을 알고 있다. 아니다, 그렇다고 믿었다고 보는 게 맞겠다.

 

모든 관계는 일대일에서만 진실이 성립한다. 그 나름으로, 각각 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나의 믿음이고, 방법이었다. 세상이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 우정의 정의가 있지만 나는 그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믿음은 여전한 것 같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나는 내 친구들의 행동을 예로 들곤 한다.

이를테면, 소파에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던 내 몸의 흉터에 연고를 발라주던 권의 모습. 나는 여기도, 여기도, 하면서 모든 흉터를 찾아냈고, 그녀는 내 손짓을 따라 연고를 발랐다. 그날 나는 엉엉 울고 말았다.

, 지극히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절대, 스스로가 지나치게 행복해해서는 안 되는 인간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시기에 최가 해온 연락들. 그때는 그의 말이 도무지 와닿지 않았지만, 그래서 언어는 불통에 이르는 도구라고 생각했지만. 후에는 결국 깨달았다. 그 마음이 얼마나 깊고 낮은데서 첨벙거리는 것이었는지.

, 이제는 언제든 죽는대도 별로 상관이 없다는 나의 말에 분개하던 백의 모습. 그는 이대로 집에 돌아가서 내가 죽는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평생을 식물인간으로 살든 말든 사하라에 가든 말든 살려낸 후에도 절대로 용서해주진 않을 거라고 했다.

그것을 사랑이 아니면 뭐라고 말해야 하지. 언젠가 내게 생겼던 물음은 결국 확신이 되었다. 남을 위해 산다는 말이 얼마나 우습게 들릴지 알고 있다. 마포구에 사는 힙스터들은 고사하고, 평범한 20대들에게도 비웃음이나 당할 일이다. 너 외롭구나, 너 늙는구나. 하는 말도 들을지 모르겠다. 외롭고 나이 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실이다. 쿨하기는 쉽다. 사랑하기가 어렵지. 노엘 갤러거가 그런 말을 했었다. 나는 그때 저 먼 섬나라에 있는 노엘을 향해 두손 두발 다 들어 공감을 표했다. 물론 노엘은 모를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그도 모를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나는 내가 생각하는 관계의 진실과 그 방식을 전하고 싶어 미친듯이 말을 쏟아냈다. 무언가 미친듯이 말을 쏟아냈다는 사실부터가 이미 불안이 커졌다는 걸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는 걸 증명한다. 그래도 전하고 싶었다. 두 달 남짓한 짧은 시간은 그를 꽤 많이 아끼게 되는 데에 충분했으므로


1. 좋지 않은 신호, 나쁜 예감.




그녀는 즉각 웃음이 터져나왔다. 마치 그를, 그의 참모습을 얼마간 잊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지금 그녀 앞에 서 있는 그는 분명 예측 불가능하고 사랑스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그녀가 사랑하는 그 남자, 오랜 친구였다. 하지만 그것은 거북한 웃음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약간 미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축 가라앉았다가 그렇게 갑자기 돌변하는 감정을, 그런 기분을 경험한 적이 이제까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어떻게 보면 완벽히 이치에 맞고, 또 어떻게 보면-그럴 가능성이 상당한데, 그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완전히 터무니없는 제안을 하려는 참이었다. 그녀는 마치 자기가 삶 자체를 다시 만들어내려고 애쓰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실패할 게 틀림없었다.

 

p181


, 나 같아.

살면서 이 말을 여러 번 들었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해본 적은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굳이 이해해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이 말을 이해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고, 어쩌면 불가능하다. 방금 내 말의 어떤 지점이, 내 사고의 진전 과정 중 어디가, 아니면 나의 말하는 방식이 그랬다는 걸까. 고민이 이어질수록 답은 떠오르지 않고 머리만 복잡해진다. 그럴 시간에는 트위스트나 추고 열심히 노는 것이 낫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너와 내가 같아, 이건 일대일로 행동과 행동을 말과 말을 성격과 성격을 상정하고서 하는 말이 아니다. 쉽게 말하면 그냥 하는 소리라는 거다. 그런 맥락에서 이 글이 이해되었으면 좋겠다. 이것도 그냥 하는 말이다. 그것이 아무리 나의 진실과 맞닿아있다 해도, 나의 글이나 말이 다소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말도 글도 어차피 배출욕에 의해 움직인다. 이 글만 쓰고 나면 한동안 묵언 수행을 할 예정이다. 묵언 수행은 남의 말에 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말을 구태여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 근데. 그래서. 묵언 수행 전에 마지막으로, 이 글에서는 한 번 해보려고 한다.

, 나 같아. 라는 말이 내게는 어떤 의미였는지 설명해보는 일 말이다.

 

사랑이 뭐냐고 그가 물은 적이 있다. 그는 믿음이라고 말했고, 나는 시간이라고 답했다. 믿음이라고 답한 그는 확신이 있어야 추진할 수 있다는 맥락이었을 것이다. 나는 확신은 처음의 느낌이면 충분하다고 본다. 나는 세상의 기준과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규정하기로 다짐했다. 항상 살짝 삐딱선을 타는 내 기질과도 결부되는 문제다. 얼마나 살기 팍팍한 세상인데, 내가 만나고 좋아하는 사람들까지 세상의 기준에 맞춰 행동해야 하나. 그렇게는 갑갑해서 못 산다. 내가 사랑이라 여기는 감정 혹은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빌려오는 것이 쉽겠다.

프랑스어로 사랑한다, 'Je t'aime'이다. 여기에 부사 많이, 를 뜻하는 ‘beaucoup'를 붙이면 ’Je t'aime beaucoup'가 되는데, 이는 나는 너를 많이 좋아해, 정도의 의미다. 그러니까 부사를 붙이면 외려 감정의 단계가 한발짝 퇴보한다. 정도를 따지는 것은 사랑이 아니므. 누군가 그런 말을 덧붙이며 얘기해주었다. 프랑스어 사용자들이 정말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면서 ‘Je t'aime, Je t'aime,'하고 발화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일치하는 편이라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산다.

내게 사랑은 그렇다. 어떤 선을 넘는 것. 그 선을 넘고나면 무슨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나는 사랑이라고 여기며 산다. 분무기처럼 흩뿌려지는 간지러운 말들, 얼굴과 머리칼처럼 다들 가지고 있으면서도 꽁꽁 숨기는 나체, 그것을 상대에게만 보여주고 섞는 행위만으로는 쉽게 그 선을 넘을 수가 없다. 그러나 시간은 그 선을 넘기게 만든다. 아마도 세상이 말하는 이 그 선의 의미와 같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보다는 조금 더. 약간 더 나아간 곳. 그것을 성취하는 일이 내게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 나 같아. 를 느낀 순간 때문에 내 감정은 평소보다 빨리 사랑의 상태에 가까워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어떤 성향이나 행동들이 나의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십대 후반부터 프랑스 체류, 그리고 돌아와서 반년 즈음까지 이십대 초반의 일들을. 친구의 어머니는 종종 나는 얼굴에서부터 생각이 많은 게 드러난다고 말했다. 그전에 마음속의 무언가를 다짜고짜 꺼내는 일이 상대를 힘들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우쳤던 나는 스스로 꽤 잘 숨기고 있다고 믿었다. 그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얄팍했던 믿음은 산산히 부서졌다. 말하는 것도 답이 아니어서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생각이 많다는 건 결국 어떻게든 드러나는 일이었다. 특히 현명하고 지혜로운 나이 든 어른들은 그런 것을 바로 꿰뚫어 봤다. 아무리 숨겨도 끝내 간파당했다. 그 날 이후로는 숨기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날들에는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세 번, 그런 날들이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과 다시는 서로 엮이지 말자고 약속한 후에.

내가 뭘하고 살든 오늘이나 내일 총맞아 죽을 수 있단 사실을 깨달은 후에.

그리고 상대가 죽어버린 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더이상 미래에 관여할 수 없게 된 후에.

 

나는 그에 대해 더는 말할 의지도 생기지 않았고, 사실은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는지도 몰라서 포기했다. 그때 내게도 무슨 말이든 해주며 붙잡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런 것은 통하지 않는다고 밀어냈다. 아니, 행동으로 밀어내지는 않았고 마음속으로만 그렇게 여겼다. 그런데 아마 티가 났을 것이다. 그 또한 그랬다.

만약 그 날들의 내 상태가 지금 그의 상태라면, 또는 그와 유사하다면. 그런 질문이 들자 곧바로 후회했다. 말로 밀어붙이고 혼란 속으로 밀어 넣었다는 생각을 멈추기 어려웠다. 내가 가진 알량한 재주와 얕은수로 누군가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 나 같아 라는 말이 더 이상 방패가 되어주지 못했다. 나는 과거의 나를 봤고, 그 때문에 당신을 많이 아꼈다는 이유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다. 그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마치 어린 나를 떠올리는 일과 닮아 있었다. 돌아가서 꼭 안아주고 그렇게까지 힘들어하고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돼, 라고 말해주고픈. 그런 기분. 내가 그를 단기간에 아끼게 된 일은 그러니 결국, 과거의 나에게 갖는 감정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과거의 나 역시 언제나 삐딱선을 타는 사람이었다. 현재의 내가 그에게 돌아가서 논리정연한 말로 설득하고 감정적으로 의지할 기반을 내어놓는다 해도, 나는 짓궂게 굴었을 것이다. 제아무리 설득해도 못 알아 듣고 똑같이 그렇게 행하리라는 사실이 자명하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대로 그를 끌고 가는 일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 되어버렸다. 나는 구구절절 많은 말을 전하고 싶어 긴 글을 썼다. 처음에는 그대로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완성한 후 보내지 않고 그대로 삭제했다. 그 또한 다시 말로 밀어붙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자전거를 타고 한강 끝까지 내달렸다. 다리 언저리가 후들거릴 만큼 긴 거리였다. 처음으로 두 시간을 넘겨 초과요금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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