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나스튜디오 김경수

소설가 김봉곤을 파주 출판단지에서 만났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AUTO›로 등단 이후 두 번째 만남이었으며, 그의 첫 소설집 ‹여름, 스피드›는 단연 지난 여름의 화제작이었다. 여름을 쓴 그이지만, 더위를 잘 타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오히려 어릴 적 교실 안에서 선풍기 두 개만으로도 버티던 교실을 생각하면서, 그때도 났는데 지금쯤이야 하며 버틴다고. 한여름의 신록이 우거진 길을 안내하는 그를 나는 천천히 뒤따랐다. 옅어진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편집자와 작가, 그 사이에서
2016년 등단 직후 문학동네에서 편집자 일을 시작했으니까, 작가 생활과 편집자 생활을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거죠. 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 어렵긴 하지만, 원칙은 ‘평일에는 소설을 절대 쓰지 않는다’는 거예요. 평일에는 구상 정도만 해두고 주말이나 연차를 이용해서 몰아 쓰는 편이에요. 편집자로서의 자아, 그리고 작가로서의 자아는 유기적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서도, 의도적으로 별개로 두려 노력하는 편이에요. 먼저 편집자로서는, 일단 모든 작가는 독자이니까 독자의 정체성을 갖고 일을 해요. 편견 없이 책을 읽다 보면 특히 좋았던 단어나 제게 크게 다가온 단어가 생기는데, 따로 적어두었다가 제 글에서 전혀 다른 맥락으로 심어놓곤 해요. 작가로서 편집일을 한다는 것은 한결 다른 차원의 작업이라 생각하는데, 한국 문학 편집자는 문장을 함부로 고치거나 수정 요구를 하기 어려운 보수적인 환경에서 일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저는 편집자와 작가의 관계가 합평과 유사하다고 느껴서, “이렇게 고쳐보는 건 어떨까요” 제안 정도는 해요. 저의 작가적인 모습을 숨기려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여름, 스피드› 그리고 사랑
‹여름, 스피드› 같은 경우는 여름에 발표할 소설이었어요. 한국 작가들은 계간지에 맞춰 소설을 발표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가급적 그 계절에 맞춰 소설을 쓰려고 해요. 여름은 일단 분자 활동이 아주 활발해지잖아요. 사랑과 착각할 만한 강렬함을 가진 계절이라고 생각해요. 봄에 꽃이 피지만 잎이 무성해지고 만개하는 시기는 여름이잖아요. 그게 사랑이 가진, 그리고 사랑할 때의 에너지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아요. ‹콜미 바이 유어네임›이나 최은영 작가의 ‹그 여름›에서도 그렇듯, 첫사랑이나 퀴어 같은 뜨거운 사랑이 여름을 배경으로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겠죠. 

소설 쓰기의 시작-우연의 연속
영상원 영화과에 입학 후 선배들의 추천으로 글쓰기 수업을 들었는데, 거기서 정이현 선생님을 만나 묘사, 진술과 같은 글쓰기를 체계적으로 익혔어요.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알아차리기보다는 그저 그 수업이 참 좋았어요. 그때부터 자연스레 서사창작과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죠. 2학년 때 강영숙 선생님의 ‹소설창작워크숍› 수업을 통해 본격적으로 소설을 써보겠다고 다짐했어요. 처음으로 단편소설의 꼴을 갖춘 작품을 쓰고 선생님이 해주신 격려, 칭찬들 덕에 영화만큼 소설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썰렁한 농담이긴 하지만 글쓰기는 영화완 달리 에코 예술이라서 끌리기도 했어요. 어떤 장르든 마감 시기에는 쓰레기, 설거지, 옷이 가득 쌓이는데, 소설 쓰기는 저희 집만 어지르는 일이잖아요. 어찌 되었든 제 선에서 수습 가능하다는 자각도 있었고요. 글쓰기는 협동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혼자서도 할 수 있는 내밀한 이야기에 더욱 집중할 수 있어요. 영화와는 달리 책임도, 찬사도 작가 본인이 짊어진다는 점이 오히려 편하고, 저랑 잘 맞아요. 그렇게 하고 싶었고요. 

경영학, 영화, 소설, 그리고 편집까지1
‘전향’에 있어 저만의 특별한 견해는 없어요. 다만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 하고 싶은 것이 또 생길 수 있잖아요. 고민하는 시간은 경우에 따라 아주 길어질 수 있겠죠.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고민이 무화될 만큼 굉장히 끌리는 순간이 와요. 그때는 제가 넘어가 버린 거니까, 고민할 필요도 없잖아요. 저는 그런 식으로 새로운 영역을 시도했어요. 무엇이 정말 하고 싶은지 계속 고민하다 보면, 결국 녹다운 되는 순간이 찾아올 거예요. 그때부터는 밀어붙이면 되는 거고요. 

자전적 소설, 그리고 공적인 글쓰기
자전적 글쓰기는 데뷔 이전부터 써왔던 형식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마음가짐은 충분히 준비된 상태였어요. 또한 아니 에르노, 필립 로스처럼 자전적 글쓰기를 하는 작가는 저 말고도 얼마든지 있고요. 수많은 에세이스트들도 있는데, 그들이 매번 상처를 받거나 악플에 시달리진 않잖아요. 저는 오히려 소설의 외양을 취했기 때문에 상처를 덜 받는 경우도 많아요. 가끔 제 글쓰기에 대한 평이 저라는 사람을 향한 직접적인 공격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어쨌든 글 안에 있는 저는 저이기도 하면서 제가 아니기도 하니까요. 이전 인터뷰에서 ‘공적인 글쓰기로 들어왔기 때문에 맷집을 길러야겠다’고 말했지만 결과적으로 글쓰기 방식이 달라지진 않았어요. 이전에는 문우들, 선생님으로부터 피드백을 받았다면 등단 후에는 문학 장내의 사람들, SNS나 행사에서 독자분들을 만나요. 하지만 처음부터 제가 추구했던 글쓰기는 아주 많은 대중 독자들보다는 저를 둘러싼 사람들을 고려한 것이었어요. 그렇다 보니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단단해질 수 있었기에 다른 글쓰기로 이어지지 않은 거죠. 저는 악플들도 빠짐없이 읽어요. 보지 않고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굴 수는 없는 타입이라 일단 보고 마음을 추스르는 편이에요. (웃음) 

‹여름, 스피드›에서 김봉곤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

‘나의 농도’ 
저는 글을 쓸 때 ‘나의 농도’라는 표현을 즐겨 써요. 등단작 ‹AUTO›의 경우는 나의 농도가 아주 짙은 소설이에요. 제가 들어가긴 하지만 실제로는 없었던 일인 ‹컬리지 포크› 같은 소설도 있어요. 저는 교토조형예술대학의 교환학생이었던 적이 없어요. 우연히 친구들과 간 여행에서 카페 ‘뮤’를 찾았고, 교토조형예술대학이 우리 학교와 자매학교라는 점을 알고 활용한 거예요. 하지만 소설의 반절을 차지하는 전 애인과의 관계와 생활은 또 사실이에요. 허구와 현실의 조합인 ‹컬리지 포크›가 있다면 현실의 농도가 매우 높은 ‹AUTO›도 있는 거죠. 

명명하는 일, 퀴어와 퀴어 소설
소설에서 낡은 티셔츠가 아니라 ‘낡은 게스 티셔츠’라고 언급하는 이유는, 우스갯소리로 운을 떼자면 어린 시절부터 메이커를 밝히는 아이였기 때문이에요. 그 물건, 그 지명, 그 꽃을 정확하게 호명하고 싶어요. 바로 ‘그것’을 지목하고 싶은 거죠. 아마 제 정체성과도 긴밀하게 연관을 맺고 있겠죠. 

뭉뚱그려진 표현이 아니라 그 사람을 ‘게이’, ‘레즈’라고, 내가 ‘나’라고 말하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하지만 제 소설이 선정적이라는 리뷰에는 동의할 수 없어요. 오히려 ‹컬리지 포크› 같은 경우는 더 선정적이지 못해 아쉬운 마음도 들어요. 선정적이라는 기준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그리고 낯선 성애 장면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정확한 단어를 지목하고 그를 선명하게 표현하고 싶어요. 

사랑에 대해 쓴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사랑했던 기억에 관해 쓰는 이유는 일단 제가 원하기 때문이에요. 소설을 쓸 때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겠다, 혹은 기막힌 통찰력을 보여주겠다는 생각보다는 당시 제가 느꼈던 감정과 제가 봤던 풍경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요. 권희철 평론가가 해설에서 인용한 롤랑 바르트의 문장 ‘자신이 간청한 존재들을 그리기 위해 소설을 썼고, 자신이 사랑한 사람들을 축성하기 위해 소설을 썼다’라는 구절도, 제가 이해한 바가 맞다면 정확하게 제가 하고 싶은 작업과 일치해요. 그 문장은 프루스트가 썼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해요. 많은 인물 군상을 보여준 이유가 그들을 소설 속에서 다시 한번 살게 하는 것이었다면요. 저 또한 쓰고 싶은 사람을 축성하고, 다시 한번 살게 하는 소설을 추구하고 있거든요. 

그가 앞으로 쓸 이야기
제 소설에 대해 들었던 최고의 말은, 평론가 황현경 선생님께서 하신 ‘이렇게나 비문학적으로 훌륭한 최악의 걸작’이었어요. 비문학적이라는 말에 생각해볼 여지도 있었고, 제가 들을 수 있는 굉장한 칭찬이라고 느껴졌어요. 제가 쓰는 것이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해도, 그 또한 사랑의 변주이고 사랑의 다른 모습일 거라 생각해요. 10월부터는 창비 문학지 ‹문학3›에서 중편 소설을 연재하기로 했어요. ‹마이 리틀 러버›라는 가제를 정했고, ‹컬리지 포크›와 ‹AUTO›에 등장했던 전 애인을 이야기하는 연애 소설이에요. 그와 헤어지거나 끝나는 이야기만 썼었는데, 이번에는 시작하는 과정부터 천천히 써보려고 해요. 

부드럽게, 때로는 장난스럽게 답해 오는 그의 뒤로 큰 창을 통해 진녹색의 여름이 쏟아졌다. 그때 나는 이 여름의 지독한 빛이 처음으로 따뜻하다고 느껴졌다. 가히 사랑과 착각할 만한 여름날이 끝나감에도, 어쩐지 외롭지는 않았다. 그가 전해줄 새 계절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 김봉곤 작가의 추천 도서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스완의 사랑› 필립 로스, ‹울분›

글 신소원 | 사진 김경수 | 영상 이세연
1 김봉곤 작가는 한예종 입학 전 경영학과에서 공부하다 그만둔 바 있다. 이후 영화과 예술사, 서사창작과 전문사를 이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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